1887년 1월 16일에 中翁 柳芝榮이 손자의 초례를 보기 위해 집으로 왔고, 그 편에 상대방에게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내용의 편지
1887년 1월 16일에 中翁 柳芝榮이 손자의 초례를 보기 위해 집으로 왔고, 그 편에 상대방에게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내용의 편지이다.
근래에 상대방의 履用이 편안하고, 良洞도 평안하며, 딸아이도 아무 탈이 없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 류지영은 손자의 초례를 보기 위해 관아의 식솔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피로가 심하다고 알렸다. 또 다섯째[柳會佑]가 알 수 없는 증세를 보여 달성에 큰아이[柳昇佑]와 함께 남겨두고 왔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아 집에 있는 사람들의 염려가 많다고 하였다. 그리고 손자의 초례를 본 후 부임지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을 한번 만나주면 기쁠 것이라고 청하였다.
편지를 쓴 발급자는 柳芝榮(1828~1896)으로 본관은 豊山이고 자는 中翁, 秀翁 등을 사용하며, 호는 志山이다. 1857년에 정시 병과 4위로 급제하였다. 司諫院司諫을 거쳐 安東 府使를 지냈다. 右承旨‧大司諫을 역임하고 兵曺參議‧金海 府使 등을 지냈다.
수신자는 피봉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는 없지만 편지의 내용과 정황을 봐서 추측 할 수 있다. 본문에서 류지영은 자신을 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장인 쪽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자녀 중 한명이 오미동 풍산김씨 종손인 金昌燮에게 시집을 갔다. 그래서 김창섭의 집안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편지를 쓴 연도의 경우 '丁'이라고 표기하여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류지영의 생몰년으로 짐작컨대 丁卯·丁丑·丁亥 가운데 하나 일 것이다. 류지영의 맏아들은 柳昇佑이고, 류승우의 맏아들은 柳會佑이다. 류회우는 1872년 생으로 15세가 되던 해가 정해년이다. 따라서 '丁'자가 들어간 해는 1887년으로 판단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1차 작성자 :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