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9월 16일, 李秀榮 외 5인이 상을 당한 일족을 돕기 위해 모금하여 부조하자는 의견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86년 9월 16일에 李秀榮(1845~1892) 외 5인이 상을 당한 일족을 돕기 위해 모금하여 부조하자는 의견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편지 내용으로는 먼저, 험한 세상을 다 겪어서 부음이 서로 이어지니 비록 이것은 한 때의 공통된 근심거리이지만 우리 집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다고 하였다. 廣皐와 楮谷의 크고 작은 상은 이루다 일일이 말할 수 없지만, 壽嶷君(李玄逸의 주손) 같은 사람은 사람과 처지가 매우 애석하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소식이 끊어져 서로 조문하지 못했지만 至親의 슬픔은 아마도 똑같을 것이라고 하면서, 요즘 상대방 측의 여러 사람들의 안부는 어떠한지를 묻고, 우리 故里 한 구역은 돌림병이 돌지 않았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族從인 자신들은 여러 달 동안 避居하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온 고을이 상전벽해가 되었으니 남아있는 자가 어떻게 사는 재미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安城 宗君의 상은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것이지만 자손이 얼마 남지 않은 가계가 겨우 실마리를 이루려고 했는데 곧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으니 마음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였다. 생각해보건대, 우리 가난한 집안이 이 집을 보호하는 방법에 있어 힘을 다한다면 彌縫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처지에 괄연히 베풂이 없어서는 안 될 듯한데, 한스럽게도 합석하여 상의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우리 집안의 三所(위토가 있는 곳으로 묘지를 지내는 곳)는 힘을 다 쓴 뒤끝이기는 하지만 지금 부조하고자 한다면 또한 이 삼소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감히 마음대로 재단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각 5냥씩 균배하자는 의론으로 고하니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만약 돈을 거둔다면 이번기회에 거두어 장례를 준비할 때에 보내는 것이 긴요할 것 같다고 하였다.
피봉의 수신처로 故里와 楮谷이 적혀 있는데, 고리는 현재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이고 저곡은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이다.
이 편지의 발신자 중 이수영은 본관은 載寧, 자는 士實, 호는 左海, 부친은 李相禹, 거주지는 英陽이다. 천거로 義禁府都事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通政大夫 敦寧府都正, 嘉善大夫 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만년에 영양 석보면 화매리에 梅溪亭을 지어 여생을 보냈다.
1차 작성자 : 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