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1월 28일, 李揆淵 외 2인이 아들 喪을 당한 상대를 위로하고 방문하지 못함을 알리기 위해 肯構堂 측에 보낸 편지
1883년 11월 28일에 李揆淵 외 2인이 아들 喪을 당한 상대를 위로하고 방문하지 못함을 알리기 위해 肯構堂 측에 보낸 편지이다.
처음 慰狀의 문두 형식처럼 "痛哭復何言耶"라고 하여 "통곡하며 다시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라는 말로 서두를 말했다. 상대 아들의 변고에 대해 그의 병세가 가볍지 않다는 점은 알았지만 천성과 행동이 진중하고 상대의 자식에 대한 성실한 염려 덕에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상이 난 후 지금은 이미 初終의 의례도 마쳤을 것이라 하며, 장례를 치르는 절차에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 유감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을 치르는 상대가 병이 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이어서 상대는 1년 상간에 두 차례나 喪故를 겪게 되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상주인 상대의 손자가 그 와중에 부득이하게 혼례를 치르게 된 것에 대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상주 역시 부친의 상이지만 감정을 절제시켜 병이 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들의 근황은 평소와 같으나, 흉년 든 상황이 갈수록 소란스러워진다고 하였다. 상대측과 東西로 멀리 떨어져 지친의 관계가 도리어 길가는 사람만 못한 처지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달 동안 더러는 병이 들고 더러는 바쁜 일이 생겨 상대 아들의 병문안도 가지 못했고, 그의 상이 난 이후 복제를 마쳤는데도 이제야 겨우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자신들은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집안의 젊은이를 대신 상대측에 보냈지만 情과 禮를 다 펴지 못했다고 하였다. 끝으로 상대가 슬픔을 잘 조절하여 건강하기를 바라고 있다.
발급자인 규연, 우연, 능연은 생몰년이나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다. 하지만 수급처인 긍구당 측에 대해 자신들을 '從'으로 표현하였고, 정미 3월에서 신미 4월까지 도산서원 방문자들을 기록한 『尋院錄』에서 '永陽 李揆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문중 소장의 다른 서간 가운데 규연의 연명편지들이 다수 있는데, 생몰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로 李孝淵(1820~1891)이 있다. 이효연은 본관은 永川, 자는 學世, 호는 預庵이다. 부친은 文鉉이고, 盈德에 거주하였다. 본문에서도 '동쪽과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지내는 상황'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이효연의 거주지로 밝혀진 영덕 영해에 이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발급자는 영천 이씨로서 거주지가 영덕이라는 점으로 보면 三碧堂 문중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1차 작성자 :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