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8월 7일, 李羲傳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조부의 상과 마을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肯舊堂에 보내는 편지
1878년 8월 7일, 李羲傳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조부의 상과 마을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肯舊堂에 보내는 편지이다.
만나서 회포를 푸는 것을 기약할 수 없으나 편지 한통을 써서 안부를 여쭙는 것이 특별하고 용이하지 않은데, 또 편지를 보내는 것을 빠트리고 쓰지 못한 것이 언제 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지 못한다면 길가는 사람을 보듯이 하지 않겠냐고 하며 당신의 성대한 도에 용서 받기를 어찌 바라겠냐고 하였다.
新凉에 堂闈의 軆事는 신의 보호를 받으시고, 부모님을 모신 뒤 끝에 당신의 彩履는 편안하며, 자제들도 잘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또 두 집의 상이 겹쳐 마음이 상하였는데 마을사람들의 상황은 어떠한지 물었다. 희전은 조부의 삼년상을 이미 지냈고, 筵几과 彷彿하게 설치하는 것도 우선 國制에 의거하였다고 하였다. 훗날 그때 당시의 禮家의 의견이 없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하늘을 덮어주고 땅이 길러준 부모님의 은혜는 날이 갈수록 멀어져 마치 처음 상을 당한 것과 같은 아픔이라고 하였다. 또 부모님이 상을 당한 슬픔에 몸이 상하여 건강하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식구와 堂內의 근황은 편안하다고 하였다.
희전은 상대방에게 우박의 근심이 지난 일이니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나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식을 거느리는 처지에 있어 조리하여 지낼 방도를 계획하였는지 물었다. 자신은 지난해에 겪은 일이라고 하였다.
가을 농사가 풍년의 기운이 있어 시가가 점점 값이 떨어지고, 인심이 정돈된다고 들었다며 태평한 시절 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교외의 상황은 처음에는 풍년이라 할 만하였는데 괴이한 기후에 대비하지 않아 장차 태반을 구제하지 못하여,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浮浦로 가는 인편이 있어 안부 편지를 쓴다고 하였다.
추록으로 아이의 관례 때 새 아이가 현명하다는 소식을 들어 세상사는 재미가 남들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지만, 시아버지가 되는 방도에 어두워 아직까지 새 아이가 어떠한 모습인지 보지 못하여 한스럽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 번 형님을 뵙는 것이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발신자는 李羲傳(1845~1905)으로 본관은 永川이고, 자는 法正, 호는 茅蹊 이다. 수신자는 肯舊堂으로 聾巖 李賢輔(1467~1555)의 집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1차 작성자 :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