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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이중범(李中範)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1+KSM-XF.1874.4717-20090831.00332570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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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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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중범, 이현발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작성시기 1874
형태사항 크기: 28 X 31.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인량 재령이씨 충효당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4년 이중범(李中範) 서간(書簡)
이중범은 처음, 며칠 남지 않은 부친의 終祥 때문에 상대가 일부러 인편을 보내 조문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상대의 아들이 일찍 죽은 것에 대해서도, 지난번 가을에 그를 만났을 적을 생각하며 애석해 하고 있다. 자신의 경우는 祥期는 며칠 남지 않았는데, 안사람도 병이 많고 수하에 부릴 만한 사람도 없어서 제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할 것이라며 걱정하였다. 그리고 상대가 일전에 제사에 쓰일 물품과 땔나무 등을 부조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해 하였다. 마지막으로 추록에는 자신이 문상객들을 치르느라 바빠 상대와 돈독하게 만나지 못한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차 작성자 : 김동현

상세정보

1874년 6월 17일, 李中範이 부친의 終祥에 인편을 통해 조문해 준 상대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忠孝堂의 藥坡 李鉉發에게 보낸 편지
1874년 6월 17일에 李中範이 부친의 終祥에 인편을 통해 조문해 준 상대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忠孝堂의 藥坡 李鉉發에게 보낸 편지이다.
발급자인 이중범은 처음, 어느덧 며칠 남지 않은 부친의 終祥 때문에 상대가 일부러 인편을 보내어 조문 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상대의 병 든 상황에 대해 알게 되어 염려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대의 아들이 요절한 것에 대해서도, 지난 가을 그를 만났을 적을 회상하며 애석해 하고 있다. 이어서 자신은 부친상을 당한 이후로 완루한 목숨을 부지하며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祥期는 며칠 남지 않았는데, 안사람도 병이 많고 수하에 부릴 만한 사람도 없어서 제사를 치를 두서가 전혀 없음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상대가 일전에 제수 물품과 땔나무 등을 부조 해 준 것에 대해 査誼를 맺은 집안간의 정의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도움을 줄 수 없었음에 감사해 하였다. 마지막으로 추록에는 자신이 문상객들을 치르느라 바빠 상대와 돈독하게 만나지 못한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李中範에 관한 두드러진 인물정보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재령 이씨 충효당 문중의 문건들 가운데 발급인이 '이중범'인 문건에서 그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충효당에 보낸 문건 중 이중범에 관한 문건은 「卽日에 族姪 중범, 用五가 보낸 서간」, 「갑신년에 通家生 眞城 이중범이 藥坡 李鉉發을 위해 쓴 祭文」 등이 있다. 그리고 영천 이씨 농암종택 문건 가운데도 「表小弟 진성 이중범의 輓詞」가 있고, 이 외에도 所志 자료 가운데 연명한 부분에 '예안유학 이중범'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도산서원의 󰡔심원록󰡕에서도 '진성 이중범'이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문서들로 유추해 보면 일단 그의 본관은 진성이며 거주지는 예안이고 재령 이씨, 영천 이씨 등과 혼반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이현발에 대한 제문'의 내용 가운데 "小子於公。受賜實多。… 新入公門。年甫十六。"라는 내용을 통해 그는 약파 이현발(1810~1884)의 문인이자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보인다. 중범과 함께 기록된 '용오'의 경우 재령 이씨 충효당 문건 가운데 이용오의 서간이 존재한다. 이 편지의 발급연도인 갑술년은 위에 언급한 '소지' 자료에 연명 기록된 여타 인명 가운데 예컨대 李敦稷(1811~1891), 柳道性(1823~��1906), 權世淵(1836~1899), 李中建(1829~1881) 등의 생몰연대와 이현발의 생몰연대로 추정 해 본다면 1874년으로 볼 수 있다.
󰡔載寧李氏寧海派譜󰡕에 의하면 이중범이현발의 장남인 李性浩(1839~1923)와 사돈지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성호의 아들이자 이현발의 손자인 李秉七(1856~1936)의 系配가 진성 이씨이며, 족보에서는 특이하게 配의 성명으로 李倒男(?~1877)이 기록되어있다. 이도남의 부친이 바로 이중범인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사돈지간인 이성호에게 보낸 것이라기보다는 査丈인 이현발에게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 편지의 본문 가운데 '상대의 요절한 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현발의 둘째 아들인 李善浩(1840~1873)의 몰년이 이 편지가 발급되기 한 해 전인 1873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선호의 忌日이 3월 20일로 되어있는데, 족보의 기록에 몰년이 잘못 기록 되어 '계유년(1873)'으로 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前秋에 상대의 아들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만일 그의 몰년이 1873년 3월 20일이라면 이 편지의 발급 연월일과 위의 기록과는 시기상 맞지 않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본문의 '玉潤'에 대한 해석이 '아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사위'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증부터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前秋' 역시 '지난번 가을'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작년 가을'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급자는 본문에서 '稽顙', '哀', '罪侍生', '哀隕莫逮之痛', '荒迷', '疏'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親喪을 치르는 중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이 문건은 單封 형태의 피봉이 존재하나 현재 배접되어있는 상황이어서 희미하게 비치는 부분을 통해서만 피봉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피봉 내용의 일부를 편지 안에 따로 덧붙여 놓은 부분이 있는데, 이를 통해 수취인이 재령이씨 충효당의 인물이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편지는 회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피봉의 내용이 따로 덧붙인 곳 바로 좌측 '稽顙白'에서부터 좌측방향 세로읽기로 내용이 진행되며, 다음으로 좌측 상단, 맨 우측 '下察'로 내용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하찰' 바로 좌측에 연월일과 발급인 성명을 기재하였다. 또 이 편지는 약 5번 정도 擡頭 및 格字, 極行 등을 사용하여 상대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였다.
마지막으로, 편지의 하단에 결락이 있는데, 본문 시작에서 셋째 줄 하단 부분은 '且'로 판독하여 앞문장과 뒷문장을 이어주면 적당할 듯하다. 그리고 10번째 줄 하단에는 '緖'자로 유추해 본다면 '일의 두서가 전혀 없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11번째 줄 하단의 경우는 문장의 구성과 투식상 '寧欲死而無聞(차라리 죽어 듣지 못하고자 하나)' 또는 '寧欲死而無知(차라리 죽어 알지 못하고자 하나)' 등의 말이 와 주어야 그 뒷문장인 '而不可得(그렇게 할 수 없으니)'과 호응될 수 있을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차 작성자 : 김동현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4년 이중범(李中範) 서간(書簡)

▣▣▣(答疏上)
▣▣▣▣▣▣(客擾欠膠甚罪)

忠孝堂 靖几下 將命者。

稽顙白。以中範之先父終祥奄屆。
專人下唁。哀感之極。不知爲狀。因伏審此來。
靖養將攝氣力。間欠天和。已不勝貢慮萬▣(萬)。▣(且)
玉潤寃慘。實是夢外夢外。前秋之面。知
其禀賦之牢實。器局亦不草草。心切倚倀矣。
一朝人事。至於此境。不覺痛惜之至。況
下執事奇愛之地。烏得不然耶。伏爲之哀
慕。不任下忱。罪侍生。頑然不死。尙延視息。遽
見祥期之只隔二日。哀隕莫逮之痛。已無可
白。主饋多病。手下無人。百無之家。專沒頭▣(緖)。
將何以過行也。觸事生惱。寧欲死而▣(無)▣。
而不可得。甚矣頑也。前期送人多助
祭需。又使負薪。無非緊之極矣。若非
査誼之篤。烏能如是也。實甚哀感。餘
荒迷不備。伏惟
下察。
甲戌 六月 十七日。罪侍生 李中範 敬疏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