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7월 8일, 사제 권익이 사돈댁에 돌아가신 사형의 상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자신의 근황과 함께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873년 7월 8일, 사제 권익이 사돈댁에 돌아가신 사형의 상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자신의 근황과 함께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사형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프고 그리운 마음을 전하고, 한편 바다의 재해가 심한데 그곳의 피해는 없는지를 물어본 뒤에 이어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다.
그동안 소식을 주고받지 못한 나머지 사형의 죽음을 일 년이 지나고서야 소식을 접하여 몹시 슬픈 마음이 든다고 편지의 첫머리에 쓰고 있다. 장마와 가뭄이 함께 닥치고 가을 기운이 문득 다가왔는데, 상중에 있으면서 몸을 상하지는 않았는지, 당신의 아들도 잘 지내는지를 물었다.
이어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데, 늙은 어버이가 조섭하시는 것이 무더위 때문에 병이 되어 여지없이 기력이 쇠했고, 자신도 또한 치아와 머리카락을 가릴 수 없이 늙어버렸다고 하였다. 영해로 갈 계획은 봄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시험결과를 기다리는 근심에 막혀서 한여름이 되어서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다. 지금 서늘한 기운을 틈타 도모할 수 있으나 부모님의 기일이 점차 다가오고 이를 지나면 마침내 가을걷이하는 때가오니 어느 때에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모든 일을 끝내기가 어렵고 서로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아 한탄한다고 하였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지금 마땅히 아이들을 보내서 곡을 해야 하지만 부모님의 기일 전에 넉넉하지 않게 돌아오게 되는 까닭에 이 또한 이루지 못할 뿐이라고 상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연유를 알렸다. 상대방의 아들이 혹 한번 찾아주기를 바랐지만 아직 소식이 없어 아마도 또한 겨를이 없을 것 같으니, 피차 다름없어 기약이 없는데 이후에 도모할 수 있을지 물었다. 바다의 재해가 심한 것을 전해 들어서 정확하진 않았지만 어제 致崇에게 전해 받은 편지에 과연 그러하였다고 하면서 사돈이 있는 곳은 피해를 면했는지 물었다. 이곳은 장마와 가뭄은 그곳과 대략 같은데 지금은 벼이삭이 올라올 때라서 타서 마르고 날씨가 일찍이 서늘해서 풍년이 들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자신이 있는 곳의 상황을 알렸다. 추록 부분에 돌림병이 사돈댁 근처에는 어떠한지를 묻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매우 이상하다고 하면서, 이어 당신의 아들에게 편지를 차마 쓰지 못해서 일부러 빠뜨려 보낸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권익(1821~1876)은 본관은 安東이고, 자는 士重, 호는 根窩이다. 아버지 璋과 어머니 고성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박한 학식이 權榘(1672~1749)를 계승했다는 평이 전한다. 金道和가 쓴 묘갈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三窩聯稿』가 전하는데 본인과 權鍍(1823~1895), 權鑽(1826~1905) 등 3형제의 원고를 모은 책이다. 편지의 말미에 나오는 '치숭'은 이수악(1845~1927)을 말하는데, 그는 권익의 사위로 본관은 載寧, 자는 穉崇, 호는 于軒이다.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출생의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이다. 1908년에 葛菴 선생의 작위를 회복하고 시호를 받는데 기여하였다. 저서로는 『于軒集』이 전한다.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옛편지낱말사전, 하영휘 외, 돌베게, 2011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