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0월 8일, 金鎭林이 무탈하게 집으로 잘 돌아온 사실을 전하기 위해 사돈인 李鉉發에게 보내는 편지
1871년 10월 8일, 金鎭林이 사돈집을 방문하고 탈 없이 집으로 돌아온 사실을 전하기 위해 사돈인 李鉉發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김진림은 일전에 冥棲庵 앞에서 서로 만났다가 竹裏館 아래에서 헤어졌던 일을 회상하면서, 노년에 한번 만나고 한번 이별하는 것은 젊을 때와는 달라서 상심이 매우 크다고 하였다. 헤어질 때에는 비선(飛仙)을 옆에 낀 듯하고 걸음 속에 바람이 나는 듯했으니, 내년 봄에 다시 만나자고 한 약속은 혹 지켜지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하였다. 이어서 여러 날 동안 의관을 정제하고 예를 갖추어 손님을 맞이하고 보낸 상대방이 건강을 해치지는 않았는지를 물어보고, 자신의 딸아이가 임신한 모습과 외손부의 정숙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위 부자에게는 바빠서 편지를 쓰지 못했다고 하였다. 사돈에게 부탁하는 말도 언급하였는데, 여러 가지 처리할 일을 자세히 하고 두루 해서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말라[寧人負我, 毋我負人].'는 뜻으로 惟性을 위해 외어주고, 날마다 竹素園(죽리원으로 추정)에서 노닐면서 古家의 문헌에 대한 풍속을 바꾸지 말게 하는 것으로 泰模의 무리들을 위해 축원해 달라고 청하였다. 자신은 열흘에서 보름 동안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온갖 잡스러운 일이 또 다시 많이 모여 있다고 하면서, 아이의 혼례 날짜가 임박했지만 빈손으로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편지 말미에는 사돈댁의 말 모는 하인이 가는 곳마다 말 먹이는 것을 부지런히 하여 말을 끄는 정성이 실로 사랑스럽다고 칭찬하였다. 그 아이에게 의지하여 늙은 자신이 탈 없이 집으로 잘 돌아오게 되었으니, 안사람에게 분부하여 음식물로 후하게 포상해 주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말로 편지를 마치고 있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金鎭林(1802~1886)의 자는 士桓, 호는 浪皤, 본관은 義城이며, 부친은 金道壽, 생부는 金羲壽이다. 副護軍을 지냈으며, 시집이 전한다.
편지 말미 부분과 피봉에서 김진림은 자신을 龜峴 査弟라고 칭하고 있다. 구현은 마을이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예전에 옹기를 굽던 구멍이 있던 곳이라 하여 구무고개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의 봉화 유곡이다. 그리고 사제라는 호칭은 친사돈에게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므로 이 편지의 수급인은 김진림의 사돈인 李鉉發(1810~1884)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현발의 자는 台應, 호는 藥坡, 본관은 載寧으로, 부친은 李壽一이고, 雲嶽 李涵(1544~1632)의 주손이다. 壽職으로 通政大夫 副護軍을 받았고, 유집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차 작성자 : 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