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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이상언(李相彦) 외 3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1+KSM-XF.1870.4776-20090831.00332570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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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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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상언, 이심찬, 이상종, 이상화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작성시기 1870
형태사항 크기: 32 X 34.2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인량 재령이씨 충효당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0년 이상언(李相彦) 외 3인 서간(書簡)
1870년 2월 13일, 영양 石浦의 李相彦 · 李心燦 · 李相琮 · 李相樺 등이 춘궁기에 문중의 진휼 조직인 竹館에서 구휼에 앞장서고, 아울러 구휼을 위한 모임을 갖기를 재령이씨가 살고 있는 仁良楮谷에 제안하였다. 그러나 발급지인 석포에 역질이 있어서 오고 가기가 어려우니 宗君이 做洞에서 여러 사람과 모임을 가지길 희망하였으며, 그 날짜가 정해지면 석포저곡에 통지해주길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차 작성자 : 김명자

상세정보

1870년 2월 13일, 영양 石浦李相彦 외 3인이 춘궁기에 문중의 구성원을 구휼하기 위한 모임을 제안하기 위하여 재령이씨가 살고 있는 仁良楮谷으로 보내는 편지
1870년 2월 13일에 영양 石浦李相彦 외 3인이 춘궁기에 문중의 구성원을 구휼하기 위한 모임을 제안하기 위하여 재령이씨가 살고 있는 仁良楮谷으로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의 앞부분에는 편지를 받는 '故里' 즉 仁良 · 楮谷과 발급지인 石浦 사이에는 고개가 동서로 놓여 있어 만날 방법이 없어 안타깝다고 하였다. 영해 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 대강의 절도는 알지만 상세한 소식을 접하지 못하여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였다고 하였다. 석보에는 최근 전염병이 돌아 문을 잠그고 지내는데, 光山 사위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과 그의 아들 子瑜가 상복을 입는 소식을 듣게 되어 더욱 괴롭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춘궁기에 마을에 양식이 떨어져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지 못함을 매우 개탄하였다. 졸렬하여 앞의 일을 계획할 식견도 해결한 계책도 없으면서도 함께 만나 충분히 의논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반성하였다. 아울러 문중의 진휼 조직인 竹館에서 비축하고 있는 재물로 진휼하기를 제안하였다. 인량저곡이 다투고 있어 구휼하는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진실한 마음으로 일을 해결하기를 도모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진휼의 문제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 합석하여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고개를 넘어 오기 힘들뿐만 아니라 마을에 역질이 돌고 있으니 宗君이 여러 명과 做洞에 모여 논의하기를 제안하였다. 이번 달 17일 전에 돈을 가지고 서로 만난다고 하니, 날을 정하게 되면 석포저곡에도 알려주길 요청하였다.
발급자 가운데 이상언(1800~1881)은 재령이씨 11세로 字가 穉健이다. 󰡔載寧李氏寧海派譜󰡕에 의하면 절충장균 행 용양위에 추증되었으며, 부인은 의성김씨숙부인에 제수되었다. 12세 이심찬(1798~1874)은 愚溪公派로 字가 士彦이고, 부인은 함안조씨이다. 11세 이상화(1805~1881) 역시 愚溪公派로 字는 樨實이며, 부인은 무안박씨이다.
이 편지는 영남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回文 형식을 띤다. 본문의 내용은 '晩'으로 시작하는 행부터 시작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미처 다 쓰지 못한 내용은 편지 위쪽의 여백에 기록하였는데, 편지지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3행을 읽으면 된다. 다시 본문이 시작되기 전의 오른쪽 여백에 나머지 내용을 썼으며, 그래도 미처 다 쓰지 못한 내용은 본문 사이의 여백에 기록하였다. 결국 편지지에는 여백이 하나도 없이 빼곡하게 글이 적혀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載寧李氏寧海派譜』, 載寧李氏寧海派宗中譜所, 2005
1차 작성자 : 김명자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0년 이상언(李相彦) 외 3인 서간(書簡)

故里 楮谷
僉案入納。
石浦族等 候書。

晩景遲隔。春序向闌。一嶺東西。際晤無緣。每想公藝同居
之樂。未始不擊節而興感。時憑那邊來扣。審
僉履大槩節度。而其詳不可得聞。此懷黯黯。第切勞{辶+山/王}而已。
族等病狀固耳。近爲冷虎毆蟄杜塞度日。光山賓閤沒之慘。
子瑜縗制之慽。漬染相繼。其爲畏懾。不斷憚亡一事已。苦事苦事。
且見春荒轉甚。閭里呼庚之象。推可知彼此一般。尤令人身不貼
席。此將奈何。顧念由來散處之苦。每當此等憂遑之際。而慨歎極
矣。吾儕拙劣。旣無先事措劃之見。又乏臨窘創濟之策。雖或各有一得之
衷。亦無由對同爛熳而發。故凡有施爲。每患抵捂不相能。此固在所
各自反求處也。如歲前如干入手之物。以若荒憂。有物在手。則竹館
賑救■(荒)之議。其目固美矣。還上齋幕〔經紀〕之不先不後者。亦有不得不爾之機焉。
甲見乙爲。俱是合做底事。則各宜視其輕重緩急。以爲先後。而思所
以竝行。而不相悖之圖。可也。而中間兩邨騷擾之端。恐非平心恕物之道也。然。
今不欲執此相較。會當有相對。一笑而罷。而惟玆二事。一旣拔落云。則
荒政一事。尙在未了。此將何以濟得所欲。繼此而願聞者也。固無蔭雨之留備。而必欲
涸鮒之呴嚅者。誠若無麵之不托。然。古語曰。毋患事不濟。惟患議不一。正謂今日受
用也。苟與之悉心相確。必行乃已。豈其無財之可辨耶。第非尺紙之所可泩復而劃之
者。不容不合席相究。
而欲以固病縶者。萬無踰嶺之勢。此邨戒端。又如右。則此將
奈何。無已則宗君。與幾員。掃萬。自力相邀於做洞邨舍。以
爲一宵叙情話之地。如
何如何。若爾。則聞有任員書。以今十七前。帶錢相要云。其來
可能指日示及耶。此未專伻。無或浮沈耶。楮谷亦宜
剋日通示是企。都在非久面悉。姑玆不盡宣。惟
僉照在。
庚午二月十三。族末相彦心燦相琮相樺等。

漢上事機。想已悉於任員書中。故不復贅言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