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2월 13일, 영양 石浦의 李相彦 외 3인이 춘궁기에 문중의 구성원을 구휼하기 위한 모임을 제안하기 위하여 재령이씨가 살고 있는 仁良과 楮谷으로 보내는 편지
1870년 2월 13일에 영양 石浦의 李相彦 외 3인이 춘궁기에 문중의 구성원을 구휼하기 위한 모임을 제안하기 위하여 재령이씨가 살고 있는 仁良과 楮谷으로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의 앞부분에는 편지를 받는 '故里' 즉 仁良 · 楮谷과 발급지인 石浦 사이에는 고개가 동서로 놓여 있어 만날 방법이 없어 안타깝다고 하였다. 영해 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 대강의 절도는 알지만 상세한 소식을 접하지 못하여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였다고 하였다. 석보에는 최근 전염병이 돌아 문을 잠그고 지내는데, 光山 사위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과 그의 아들 子瑜가 상복을 입는 소식을 듣게 되어 더욱 괴롭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춘궁기에 마을에 양식이 떨어져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지 못함을 매우 개탄하였다. 졸렬하여 앞의 일을 계획할 식견도 해결한 계책도 없으면서도 함께 만나 충분히 의논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반성하였다. 아울러 문중의 진휼 조직인 竹館에서 비축하고 있는 재물로 진휼하기를 제안하였다. 인량과 저곡이 다투고 있어 구휼하는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진실한 마음으로 일을 해결하기를 도모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진휼의 문제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 합석하여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고개를 넘어 오기 힘들뿐만 아니라 마을에 역질이 돌고 있으니 宗君이 여러 명과 做洞에 모여 논의하기를 제안하였다. 이번 달 17일 전에 돈을 가지고 서로 만난다고 하니, 날을 정하게 되면 석포와 저곡에도 알려주길 요청하였다.
발급자 가운데 이상언(1800~1881)은 재령이씨 11세로 字가 穉健이다. 載寧李氏寧海派譜에 의하면 절충장균 행 용양위에 추증되었으며, 부인은 의성김씨로 숙부인에 제수되었다. 12세 이심찬(1798~1874)은 愚溪公派로 字가 士彦이고, 부인은 함안조씨이다. 11세 이상화(1805~1881) 역시 愚溪公派로 字는 樨實이며, 부인은 무안박씨이다.
이 편지는 영남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回文 형식을 띤다. 본문의 내용은 '晩'으로 시작하는 행부터 시작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미처 다 쓰지 못한 내용은 편지 위쪽의 여백에 기록하였는데, 편지지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3행을 읽으면 된다. 다시 본문이 시작되기 전의 오른쪽 여백에 나머지 내용을 썼으며, 그래도 미처 다 쓰지 못한 내용은 본문 사이의 여백에 기록하였다. 결국 편지지에는 여백이 하나도 없이 빼곡하게 글이 적혀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載寧李氏寧海派譜』, 載寧李氏寧海派宗中譜所, 2005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