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11월 4일, 李羲傳이 丹山 등에서 다시 신주를 옮기는 일을 전하기 위해 종형에게 보내는 편지
1868년 11월 4일, 李羲傳이 丹山 등에서 다시 신주를 옮기는 일을 전하기 위해 종형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먼저, 西城에서 한번 이별한 것이 이렇게나 갑작스러움을 면치 못하는데, 하물며 지금 先祠에 일이 있어서 매우 마음 아픔 느끼는 것에서이겠냐고 시작하였다. 한번이라도 서로 위로할 수 없으니 도리어 우리는 겨드랑이가 있어도 날개가 없어 한스러울 뿐이라고 하였다. 새처럼 날아가 위로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겨울이 깊어 가는데, 상대방의 어머님 및 상대방, 집안 식구들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자신은 조부모와 부모님께서 연달아 병환이 있고, 대인께서는 지난번에 서행을 갔다가 그 돌아오시는 것이 마땅히 일간에 있어야 하는데 눈이 곧 내려서 매우 근심할 만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사문의 액, 즉 서원 철폐령은 돌아가신 존현의 터를 생각함에 한결같이 시름겹고 참혹하니 이를 장차 어찌하겠냐고 하였다. 지척의 서원이나 향교를 생각하니, 아침저녁으로 여전히 그리워하던 나머지 더욱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또한 감히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어, 통문을 돌리는 한 가지 일은 지난달 초열흘께 南州에 있는 {亻+政}弟에게 보냈으나 저들 가운데 玉山의 親廟 孫祠도 갑자기 變中에 들어감을 말한 것이니, 이전까지의 정분에 어찌 감히 孝節公[聾巖 李賢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습니까마는 이때의 이 일은 감히 말씀하신대로 할 수 없었고, 또 이곳의 각성바지들도 모두 이러한 탄식이 있었으니, 그 세력이 행해짐을 운운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계획은 이런저런 논의를 막론하고 마땅히 본향 사림들과 함께 헤아려 볼 것이나 다만 요즘의 상황을 생각하는 것도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될 것이지만 다만 장차 고요히 때를 기다려 大同의 體例를 보는 것도 어떠하겠냐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丹山[영해]은 9월 열흘 사이에 훼손이 있어서 금번 10월 초순에 또 다른 곳으로 옮기었던 神主를 다시 제자리로 모셨는데 지금은 또 훼손이 되었습니다. 盈德 南江祠는 진작 위패를 묻었으나 장차 다른 곳으로 옮겼던 신주를 다시 봉안하여 막 위패를 새로 만들었는데, 일자가 닥쳐 또 훼손됨이 있으니, 이때 변고에 대처하는 것은 이래나 저래나 어려워서 이 고을 여러 곳 本孫들은 혹 대청이나 齋庵에 임시로 모셨으니 모르겠지만 西鄕, 즉 안동과 예안 등지에서는 모두 어떠한지 물었다.
발급인 이희전(1845~1905)은 자는 法正이고, 호는 茅蹊이다. 본관은 永川이고, 아버지는 孝淵이다. 盈德 寧海에 살았다. 유고가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