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11월 6일, 李在徵이 상대방 가족들 및 자신의 딸 안부를 묻기 위해 사돈에게 보내는 편지
1867년 11월 6일, 李在徵이 상대방 가족들 및 자신의 딸 안부를 묻기 위해 사돈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아득히 멀고도 먼 산천으로 격조하였으니, 간절하고 지극하던 사이에 소식은 열 손가락을 꼽아 세월만 헤아린다고 하면서 비록 잊어버렸다 말하더라도 해가 다 가려고 하는데 어찌 한줄 정회가 없겠냐고 하였다. 추위가 점점 매서워지는데, 부모님의 안부와 어버이를 모시는 일상생활도 잘 지내시는지, 딸아이도 또릿또릿하게 음식 만드는 것을 소임으로 삼을 줄을 알고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을의 가족들도 아울러 어떤지 물어보면서 그리움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어머니 곁에서 매양 건강이 좋지 않으나 외가에서 근래에 이를 앓아 이불과 요 안의 물건이 되는 것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맏형은 우선 예전처럼 지내고 아이들은 탈 없이 지내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한 번 보기로 한 약속은 아득하여 앞으로도 기약이 없으니, 대신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도 제때 하지 못하여 편지를 대하니 근심되고 서운하다고 하면서 비록 백장을 쓰더라도 다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다. 이어, 늘 편안하기를 기원한다고 하면서 편지를 마쳤다.
발급인 이재징은 김창섭의 외조부이다. 안동 오미 풍산김씨 허백당종택에서 나온 1900년 金昌燮 戶口單子 자료 가운데 "外祖學生李在徵本驪州"라고 나온다. 호구단자는 가족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