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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이상운(李相運) 외 9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1+KSM-XF.1863.4776-20090831.00332570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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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상운, 이상언, 이상현, 이상종, 이상흡, 독동 회중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작성시기 1863
형태사항 크기: 33 X 3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인량 재령이씨 충효당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3년 이상운(李相運) 외 9인 서간(書簡)
1863년 11월 15일, 이상운 외 9인이 독동 회중에 모임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과 회의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쓴 편지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이번 모임에 직접 참여하기 어려움이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대신 이들은 이번 모임의 의논에 대한 의견을 편지를 통해 전하고 있다. 모인 물건이 흡족히 천여 남짓이 되니 절반은 이잣돈을 취하고 절반은 토지를 사들여 정해진 장소의 의논을 조금 개정함을 기다리니 반드시 노성한 이들이 모이기를 기다린 이후에 결정할 수 있다고 의견을 전한다. 이에 토지를 사들인 조목 수삼백금은 우선 봉치하고 형세를 보아 변리하는 것이 어떠할지 묻는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載寧李氏寧海派譜』,
1차 작성자 : 서은주

상세정보

1863년 11월 15일, 이상운 외 9인이 독동 회중에 모임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과 회의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쓴 편지
1863년 11월 15일, 이상운 외 9인이 독동 회중에 모임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과 회의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쓴 편지이다.
우선 이들은 편지 서두에서 독동 회중의 노소 모두의 안부를 물으며 그리움을 전하고 있다. 이어 이들은 자신들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자신들은 각기 좋은 모습은 없고 시체처럼 지내면서 재미가 전혀 없이 지내고 있다고 한다. 穉健, 殷弼은 병 때문에 어찌할 겨를이 없이 죽었으며, 懋彦은 추위를 무릅쓰고 이동하던 뒤 끝에 감기로 콜록거리고 있다. 穉實은 종손이 요절하여 추위를 무릅쓰고 뼈를 묻었으니 죽은 자를 슬퍼함을 말할 겨를이 없는데 다시 이전의 병을 더하였다. 또한 그 나머지 각 집도 또 전부 편안하지 않다고 자신들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에 이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번 모임에 직접 참여하기 어려움이 있다고 전한다. 이들은 이번에 모이는 일은 우리 가문이 크게 의논하는 것으로 비루한 우리들의 졸렬한 모습이 비록 경중이 없더라도 마땅히 일제히 나아가야 하지만 참석하여 듣는 나머지에 마침 이와 같이 몸을 일으킬 수 없음을 맞닥뜨렸다며 다만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보내니 어찌 감히 참작하여 용서함을 바라겠냐고 죄송하고 유감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대신 이들은 이번 모임의 의논에 대한 의견을 편지를 통해 전하고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이들은 이것은 큰 계책이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인데 미흡한 데가 없이 충분히 의논하여 서로 확정하여 선입견으로 위주를 삼지 말고 자기 견해만 내세움이 없이 상하의 그 논의가 지당함에 힘써 귀결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이 면의 여러 일들이 마침 그러하고 동파의 추위가 이와 같고 형세가 혹 이와 같아 참여하지 못하니 비루한 자신들의 뜻은 모든 절차를 수렴하여 변통하여 처리하라고 하고 있다. 또한 여러 해 경영함을 염두에 두어 매년 일이 뜻대로 되어 다 된 세상인심도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모인 바의 물건이 흡족히 천여 남짓이 되니 절반은 이자를 취하고 절반은 토지를 사들여 정해진 장소의 의논을 조금 개정함을 기다리니 반드시 노성한 이들이 모이기를 기다린 이후에 결정할 수 있다고 의견을 전한다. 이에 토지를 사들인 조목 수삼백금은 우선 봉치하고 형세를 보아 변리하는 것이 어떠할지 묻는다. 또한 조상들의 무덤은 무너짐이 매우 심하니 원근이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탄식하나 현재 물력은 매번 종이로만 전해지고 우선 이에 이르러 지연되니 심상히 근심스럽다며 듣기에 모이는 날 만약 좋은 의논이 있어 거두어들이기를 택하여 거듭 조성할 기약이 있으니 조상을 위한 정성이 진실로 매우 축하할 만하다고 전한다. 이어 무릇 자손들이 맡은 임무인 이 모임을 누가 어길 수 있겠냐며 모임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며 편지를 마친다.
󰡔재령이씨영해파보󰡕에 의거하여 본문에 언급된 인명 내지 발급인 인명에 대해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李相運(1781~1864)은 자는 穉亨, 호는 石坡이며, 호군공파 存齋 李徽逸의 후손이다. 李相彦(1800~1881)은 자는 穉健이며, 折衝將軍行龍驤衛에 제수된 이력이 있고, 석계공파 恒齋 李嵩逸의 후손이다. 李相顯(1800~1872)은 자는 文淑이며, 석계공파 平齋 李隆逸의 후손이다. 李相琮(1801~1885)은 初名이 相琮이며 본명은 李相逵로서 자는 殷弼이며, 優老 恩典으로 崇政大夫에 제수되었다. 그는 석계공파 항재 이숭일의 후손이다. 李相翕(1798~1859)은 자는 穉和이며, 석계공파 葛菴 李玄逸의 후손이다. 李相勣(1805~1887)은 자는 懋彦, 호는 魯隱으로 우계공파 李傅逸의 후손이다. 李相樺(1805~1881)는 자는 穉實이며, 우계공파 이부일의 후손이다. 李奎燦(1803~1864)은 字 啓伯으로 우계공파 이부일의 후손이다. 李相瑾(1807~1870)은 자는 子瑜이며, 석계공파 항재 이숭일의 후손이다. 李秀榮(1809~1892)은 자는 士實, 호는 左海이며, 석계공파 항재 이숭일의 후손이다. 그는 천거로 義禁府都事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 通政大夫 敦寧府都正, 嘉善大夫 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만년에 석보면 화매리에 梅溪亭을 지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위의 인물들은 모두 본관이 載寧으로, 재령 이씨 영해파 문중 내에서도 주로 석계공파 또는 우계공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항렬 상 같거나 또는 연배가 비슷한 인물들이 연명하여 작성한 간찰이다. 이들은 모두 영양 석보 출신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차 작성자 : 서은주, 2차 작성자 :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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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63년 이상운(李相運) 외 9인 서간(書簡)

篤洞會中。僉案 入納。
石浦族從等。候狀。

冬日或溫或寒。未尋。
僉履動靜沖裕。各村老少俱安否。不禁面面遐想。
族從等。各無善狀尸居者。了無況味。穉健殷弼
以愼五日病。蒼黃度了。懋彦冒寒移動之餘。感
氣喘喘。穉實從孫夭化。犯寒埋骨。悼亡不暇言。而
更添前恙。其餘各家。又未全安奈何。今番會事。
吾宗大議論處。鄙等之踈劣。雖無重輕。當齊
進。參聽緖餘。而適値如右未得起躬。只送若爾人。
悚恨無已。何敢望參恕耶。此是大計。不可率爾。
輕發定頭之際。爛漫相確。無以先入爲主。無以己見
自立。上下其論。務歸至當。而此會。又至零星。豈誠
薄而然也。此面事。故適然東波。寒威如此。勢或如此。
鄙等之意。則收斂凡節。另意區處。而旋念積年
經營。每年如意。而叔世人心。亦難料度。所聚之物。洽
過千餘折半。便利折半入土。而定所之
議。稍待開正。必須老成齊會。而後可決
處。入土條數三百金。姑爲封置觀勢。便
利如何。墳巖頹圮須甚。遠邇所恐憂
歎。而見在物財。每從紙上傳。故至此
遷稽心常悶然。卽
問瞻掃之日。別出好
議論擇任收聚做
有重營之期。爲先
之誠。誠極可賀。凡爲
子孫之爲任者。孰不
着念違越。次會者
乎。望須千萬加意
亦如何。餘不宣。姑留
僉照。
癸亥 至月 望日。 族從 相運 相彦 相顯 相琮 相翕 相勣 相樺 奎燦 相瑾 秀榮 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