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9월 25일, 김진림이 상대방 선조의 문집을 교정하는 일과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돈인 이현발에게 보낸 편지
1861년 9월 25일, 金鎭林이 사돈인 李鉉發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상대방 선조의 문집을 교정하는 일의 진행 정도를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먼저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이어서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적고 있다. 지난번 상대방이 와서 서로 즐겁게 지냈는데 이렇게 이별하게 되니 그리움이 심하고 지난번 菊村의 인편을 통해 당신의 편지를 잘 받았다고 하고 있다. 또한 당신의 형제분과 딸아이 三母子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東坡에 가서 새로 들일 며느리를 만났는데 그 모습이 자신의 맘에 들어 혼례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있다. 안부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편지에 적고 있다. 먼저 상대방의 선조 문집을 교정하는 일은 이 달 초 族兄인 金岱鎭에게 부탁하였으나 김대진이 집안의 무덤을 옮기는 일로 정신이 없어 일의 진행이 더디게 되어 미안하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문집에 쓰일 竹裏館記도 초고를 완성한 후에 보내 드리겠다고 하고 있다. 편지가 끝나고 추록에서는 남에게 부탁하여 솜을 샀으나 솜의 가격이 많이 올랐고 털도 풍부하지 않으며 수량도 부족하니 다른 날에 사람을 보내 솜을 보내겠다고 하고 있다. 또한 그 동안 편지 한 장도 보내지 않은 사위를 질책하며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사위에게 전달해 주고 槐市의 인편이 재촉하여 이만 편지를 마친다고 하고 있다.
발급인인 金鎭林(1802~1886)은 자는 士桓, 호는 浪皤, 본관은 義城으로 원래 金羲壽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후 金道壽의 양자로 가게 된다. 副護軍을 지냈다. 수취인인 李鉉發은 자가 台應, 호는 藥坡 본관이 載寧으로, 李壽一의 아들이다. 壽職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을 받았다. 이 편지에서 수취인이 "翼洞 棣靜座"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현발의 장자인 李性浩(1839-1923)와 김진림의 둘째딸인 義城金氏가 혼인한 사실을 통해 수취인이 사돈인 이현발과 그의 형제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편지에 등장하는 선현의 문집은 雲嶽先生 李涵(1554~1632)의 문집이다. 이함의 문집은 그의 주손인 이현발의 주도하고 金岱鎭(1800~1871)의 교정을 거쳐 간행되었다. 김대진은 자가 泰叟, 호는 訂窩, 본관은 義城으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가 이함의 문집을 교정보게 된 것은 당시 이현발과 김진림이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편지는 의성김씨 문중과 재령이씨 문중과의 교유관계와 조상을 높이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 수 있다. 영남지역에서는 19세기 활발하게 조상문집이 간행되고 조상의 묘소를 정비하는 사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雲嶽先生 李涵의 문집 또한 19세기 이함의 주손인 이현발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이현발과 혼맥으로 맺어진 의성김씨 또한 이 과정에 참여하였다. 즉 혼맥으로 맺어진 이 두 문중은 비록 선현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영남의 유림으로서 선현을 기리는데 아낌없이 지원하는 모습을 통해 영남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家格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차 작성자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