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9월 1일, 李海膺이 문집간행에 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재령이씨 宗堂에 보내는 편지
1861년 9월 1일, 李海膺이〪문집간행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기 위해 재령이씨 宗堂에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 내용으로는 먼저, 행차가 산외를 지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만나지 못하여 섭섭한 마음을 전하고, 가을 중에 촌내의 여러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심한 더위 중에 구차하게 살았지만 가을이 되어 병이 심해졌으니 '가을바람에 병이 나으려고 한다.'는 말은 시인의 골계인 듯하다고 말하면서, 집안에도 근심이 많아 더욱 슬프고 근심스러울 뿐이라고 하였다. 門會는 과연 정해진 날에 행해졌는지의 여부와, 물려서 행해진다는 말은 어디서 지어낸 것인지 물었다.〪문집간행에 관한 일은 소문으로 내년 봄으로 정해졌다고 하니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고명한 가르침을 대할 길이 없어서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보니 답답하다고 하였다. 서문은 大坪의 定齋 柳致明(1777~1861)에게 바라고 있는데, 병이 나아지려 한다고 하니 직접 가보고 싶지만 몸을 움직일 방도가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신중해야 할 논의가 이따금씩 털을 불 듯 쉽게 하는 것은 원근에 있는 자손들의 성의가 우리들보다 너무 지나쳐서 그런 것이냐고 하였다. 각수는 어제 왔지만 움직이기 어려운 연고로 重九日 후에 일부로 간다고 하니, 상대방에게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訂窩 金岱鎭(1800~1871)이 撰한 「竹裏館記」에서 '行裝'이라는 한 조목을 더 넣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묻고, 발문과 碑陰記는 문집 중에 넣기를 청할 생각인데 東林 柳致皜(1800~1862)가 글 잘하는 사람에게 부탁할 것이라고 하였다. 刊本은 이미 川前의 벗에게 약속 했으니, 글이 오지는 않았지만 먼저 4~5민 동의 돈을 각수가 돌아오는 편에 보내달라고 부탁하면서, 빈곤한 사람이 기일 전에 준비하기 어려운 점을 헤아려달라고 하였다. 편지 말미 부분에는 玄平〪舍兄이 돌아가는 편에 士彦에게 편지를 부쳤니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편지는 李涵(1554~1632)의 문집인 『雲嶽集』을 간행할 때 여러 가지 제반 사항을 서로 상의하기 위해 보낸 것인데, 『운악집』은 1861년에 2대 종손인 藥坡 李鉉發(1810~1884)의 주선으로 訂窩 金岱鎭의 교정을 거쳐 목판본으로 출간되었다. 편지 내용 중에 문집 서발문과 비음기 등을 글 잘하는 사람에게 의뢰하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 문집의 편제에서 서문은 李彙載(1795~1875), 발문은 김대진, 묘지명은 柳致皜 등이 지었다. 『운악집』의 저자인 이함은 자가 養源, 호가 雲嶽, 본관이 載寧, 부친은 李殷輔이며, 영덕 영해에 거처하였다. 1588년 式年試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고 1600년 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義禁府都事‧司宰監直長‧主簿‧宜寧縣監를 역임하였다. 이함은 재령이씨 가학 연원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데, 손자 葛庵 李玄逸의 현달로 인해 嘉善大夫 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不遷位로 모셔져 있다.
편지의 발급인인 李海膺(1783~1871)은 자가 楊叟, 호가 江棲, 본관이 載寧이며, 부친은 李宇均이다. 제자서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性理全書』를 깊이 탐독하여 안으로 수양하고 밖으로 실천하였다. 安東座首를 역임하였다.
이 편지의 형식은 일반적인 간찰의 형식을 따라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回文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발급인은 우측과 상단에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하여 본문에 다 적지 못한 사연을 남겨둔 상여백과 오른쪽 여백에 90도씩 회전하면서 적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차 작성자 : 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