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12월 20일, 재령이씨 李光羽 외 3인이 영해 인량의 족친에게 爲先事業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모임에 대해 묻는 편지
1858년 12월 20일, 李光羽, 李相尹, 李相彦, 李箕燦 등이 영해 인량의 족친에게 爲先事業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방도를 의논하기 위한 모임을 '宗稧會'에 의지해도 되는지 묻는 편지이다. 편지에는 수신자가 표기되어 있지는 않으나 원소장처가 재령이씨 충효당이기 때문에 영해 인량의 재령이씨에게 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안부를 묻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楮谷에서 여러 번 상을 당했으나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되어 조문을 가지 못해 고통스럽다고 하였으며, 南谷의 원통스런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산에 눈이 덮혀 있고, 일기도 고르지 못하는 가운데 여러 형들의 안부는 어떤지 물었다. 형들이 기거하는 곳에 냉증이 흥하여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하니 어떤지 걱정하였다. 인량은 재령이씨 영해파 문중의 근본이 되는 마을이니 더욱 탄식스럽다고 하였다. 발신자 李光羽를 비롯한 족형들은 문중이 쇠하고 상을 여러 번 당하였으며, 병이 돌아 빈집이 많으며, 子瑜는 아내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일상적인 소식을 전한 이후에는 楊州의 묘지기가 통문을 가지고 왔는데, 통문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수락하기가 어렵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요구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위선사업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편지 내용에 '선조를 위한 정성스러운 마음은 있으나 좋은 계책이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함께 모여 의논하면 좋은 방도가 있을 것이나 모임을 위한 자금 마련 또한 어려우니 '宗稧會'에 의지해도 무방한지 물었다. 묘지기가 함안과 진주로 방향을 바꾸어 가는데, 그에게 조금의 돈이라도 보태 주어야 하나 전에 없던 흉년으로 그 마저도 할 수 없어 탄식스러워 하였다.
추록에는 여러 번의 일을 겪은 나머지 公私의 돈과 곡식이 모두 고갈되어 큰일을 잘 마무리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하였다. 茅谷은 외손의 후예이지만 옛날의 집과 토지를 여전히 지키고 있으니 도와줄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편지의 발신자 李光羽, 李相尹, 李相彦, 李箕燦은 재령이씨 石溪公派이다. 10세 이광우(1789~?)는 字가 聖瑞이며, 부인은 봉성금씨이다. 11세 이상언(1800~1881)은 字가 穉健이고, �載寧李氏寧海派譜에 의하면 절충장군행용양위에 추증되었으며, 부인은 의성김씨로 숙부인에 제수되었다. 이상언의 종형제 이상윤(1794~1860)은 字가 殷卿이며, 부인은 함안조씨이다.
이 편지는 영남지역 편지에서 많이 보이는 回文 형식을 띤다. 내용은 '歲'로 시작하는 행부터 시작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미처 다 쓰지 못한 내용은 편지 위쪽의 여백에 기록하였는데, 편지지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4행을 읽으면 된다. 본문이 시작하기 전의 오른쪽 공백에 편지 작성시기와 발신자 4명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추록 역시 편지지의 위쪽 여백에 기록하였는데, 편지지를 왼쪽으로 돌려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6행을 읽으면 끝난다. 위쪽 여백의 왼쪽에는 본론 끝 부분의 내용이 있고, 오른쪽에는 추록이 기재되어 있어, 결국 편지지에는 여백이 하나도 없이 빼곡하게 글이 적혀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