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 12월 8일에 이동항이 조 생원에게 부인동 향약과 최식의 일을 도와달라고 보낸 편지
1804년 12월 8일에 이동항(李東恒)이 조 생원에게 보낸 편지로, 부인동(夫仁洞) 향약계(鄕約事)에 대한 달성 판관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최식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담았다.
겨울철 건강과 식구들의 안부를 물은 뒤 그럭저럭 지낸다는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부인동(夫仁洞) 향약계(鄕約事)는 도내 선비가 전에 도장을 올렸으나 감영의 제사가 매우 엄하고 당시 달성 판관[達判]이 한양에 있어 즉시 말하여 부치지 못했으며, 본관이 돌아온 뒤에도 다른 일이 생겨 실행하지 못했다고 했다. 도회(道會) 때는 연경서원에서 소를 잡은 일로 최식(崔㵓)을 잡아와 그 노비를 대신 매질하고 또 속전을 몹시 독촉하였는데, 연경 서원에서 객의 접대를 위한 일이 최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판관이 이렇게 하는 것은 본 일을 헤치고 도내 선비들을 욕보이려는 의도에서 나왔으니, 어찌 이같이 좋지 않은 일이 있느냐고 개탄하였다. 이곳 선비들의 논의는 원근에 글을 보내 성원하려는 형세인데 서로 알릴 길은 없고 일은 매우 급하니 어찌하느냐며, 도남서원의 모인 자리에서 이 의론을 내어 서로 돕는 것은 최식에게 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도내에도 빛이 나니 힘써 시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부인동 향약은 백불암 최흥원이 35세 때인 1739년(영조 15)에 시작한 이후 200여 년이 넘게 지속되었는데, 농민들의 생활안정을 우선 고려하면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하려 한 것이다. 부인동 향약은 조선시대에 가장 성공한 향약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정조 임금께서 칭송하는 전교가 내려졌으며, 당시의 대학자인 안정복과 채재공도 극찬하였다. 평생을 팔공산에서 은거하면서 당시 영남 유림을 이끌었던 백불암 최흥원은 살던 마을 이름인 옻골 즉 칠계(漆溪)를 따서 칠계 선생으로도 불리었다. 퇴계 학맥을 이은 대산 이상정, 남야 박손경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을 받는 유학자이자 경제학자라 평가 받고 있다. 이동항(李東恒)은 본관은 광주, 자는 유상(有常), 호 학남(鶴南) 이다. 이원록(李元祿)의 후손이다.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