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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 이동항(李東恒)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1+KSM-XF.1804.4785-20090831.02302570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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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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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동항
작성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작성시기 1804
형태사항 크기: 34.9 X 38.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승곡 풍양조씨 입재공파종택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04년 이동항(李東恒) 서간(書簡)
1804년 12월 8일에 이동항이 조 생원에게 부인동 향약(鄕約)과 최식의 일을 도와달라고 보낸 편지이다. 부인동 동약에 대한 상소 일은 달성 판관이 다른 일이 있어 처리하지 못했다고 하고 있다. 또한 최식이 연경서원에 소를 잡은 일로 곤혹을 겪고 있으니 도남서원에 모여 상의해 보자고 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김인호

상세정보

1804년 12월 8일에 이동항이 조 생원에게 부인동 향약과 최식의 일을 도와달라고 보낸 편지
1804년 12월 8일에 이동항(李東恒)이 조 생원에게 보낸 편지로, 부인동(夫仁洞) 향약계(鄕約事)에 대한 달성 판관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최식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담았다.
겨울철 건강과 식구들의 안부를 물은 뒤 그럭저럭 지낸다는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부인동(夫仁洞) 향약계(鄕約事)는 도내 선비가 전에 도장을 올렸으나 감영의 제사가 매우 엄하고 당시 달성 판관[達判]한양에 있어 즉시 말하여 부치지 못했으며, 본관이 돌아온 뒤에도 다른 일이 생겨 실행하지 못했다고 했다. 도회(道會) 때는 연경서원에서 소를 잡은 일로 최식(崔㵓)을 잡아와 그 노비를 대신 매질하고 또 속전을 몹시 독촉하였는데, 연경 서원에서 객의 접대를 위한 일이 최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판관이 이렇게 하는 것은 본 일을 헤치고 도내 선비들을 욕보이려는 의도에서 나왔으니, 어찌 이같이 좋지 않은 일이 있느냐고 개탄하였다. 이곳 선비들의 논의는 원근에 글을 보내 성원하려는 형세인데 서로 알릴 길은 없고 일은 매우 급하니 어찌하느냐며, 도남서원의 모인 자리에서 이 의론을 내어 서로 돕는 것은 최식에게 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도내에도 빛이 나니 힘써 시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부인동 향약은 백불암 최흥원이 35세 때인 1739년(영조 15)에 시작한 이후 200여 년이 넘게 지속되었는데, 농민들의 생활안정을 우선 고려하면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하려 한 것이다. 부인동 향약은 조선시대에 가장 성공한 향약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정조 임금께서 칭송하는 전교가 내려졌으며, 당시의 대학자인 안정복채재공도 극찬하였다. 평생을 팔공산에서 은거하면서 당시 영남 유림을 이끌었던 백불암 최흥원은 살던 마을 이름인 옻골칠계(漆溪)를 따서 칠계 선생으로도 불리었다. 퇴계 학맥을 이은 대산 이상정, 남야 박손경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을 받는 유학자이자 경제학자라 평가 받고 있다. 이동항(李東恒)은 본관은 광주, 자는 유상(有常), 호 학남(鶴南) 이다. 이원록(李元祿)의 후손이다.
1차 작성자 : 정재구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04년 이동항(李東恒) 서간(書簡)

趙生員下執事。
【謹封】
阻拜已經年。悵仰曷勝。伏惟窮冬。
靜養動止萬重。眷下諸節。亦得均吉。伏慰區
區無任之至。侍生。僅依昔狀。無足仰浼。就夫仁洞
約事。道儒曾呈道狀。營題甚嚴。而時以達判。未
卽道付矣。本官旣還之後。又生別層枝節。以道會
時。硏經推牛事。捉致崔㵓。代杖其奴。又從以嚴督贖
錢。硏院接賓之具。於友何干。而判官之所以爲此者。
專出於謀害本事。貽辱道儒之意也。末路人心。雖曰叵
測。而豈有若是之無良乎。此中士論。要得遠近通章。以
爲聲援之勢。而相通無路。事機甚迫。此將奈何。
執事於此家事。想不恝然。倘於道南會席。發此議論。以
爲同聲相救之地。則非但有德崔友。抑亦生色於道內。
千萬另施。伏望耳。此等公議。固不待年少權成。而
此處士論。恐未詳悉。故玆以回便告耳。此便
深忙。未得修書於秀汝兄家。伏恨。不備。伏惟。
甲子 十二月 初八日。侍生 李東恒 再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