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12월 27일 이경유가 도남서원 일관당(一貫堂)에서의 모임과 주변의 여러 일들에 관해 상의하는 편지
1801년 12월 27일 이경유(李敬儒)가 미상의 수신자에게 보낸 편지로, 도남서원 일관당(一貫堂)에서의 모임을 알리고 유고가 있으면 미리 알려 줄 것을 부탁하면서 주변 일들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을 상의하는 편지이다.
편지를 보냈다는데 받지 못하여 의아하던 중에 편지와 본고(本藁)를 받아 서너 번 읽고 성대한 말이 볼만하여 날마다 흠탄했지만 섣달에 병을 앓는다는 것을 알고는 염려를 견딜 수 없다고 첫 인사를 하였다. 자신은 어버이를 모시며 그럭저럭 예전처럼 지내 끝내는 군자께서 버리게 될까 두려워 부끄럽고 한스럽다고 자신의 근황과 심정을 전했다. 편지에서 한 말은 적절하여 연중(延中)이 우산(愚山)과 두릉(杜陵)에 준 편지의 대의와 비슷하니 지극한 뜻을 받들어 여러 현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혜염(薤鹽)을 바치기 위한 도모는 2월 9일 일관당(一貫堂)에서 열기로 정했는데 이날 다른 장애는 없는 지를 물으면서 만약 유고가 있으면 미리 알려 달라고 당부하였다. 우산과 두릉의 답장 편지는 모두 가까운 친구들이 빌려가 드리지 못하니 뒷날을 기다릴 뿐이며 도원(道院)의 일은 수석(首席)이 단자를 내어 바뀌었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추천을 받아 자리가 오래 비지는 않게 되어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중씨(仲氏) 척형(戚兄)이 한 때 잊어버리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나, 앞 편지의 지나친 인혐(引嫌)은 과중한 것 같다는 생각을 전하면서 끝인사를 붙여 마무리 하였다.
이경유(李敬儒, 1750~1821)는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자(字)는 덕무(德懋), 호(號)는 임하(林河)이며, 상주 북곽(北廓)에 거주하였다. 식산(息山) 만부(萬敷)의 증손이며, 승연(承延)의 아들이다. 음보로 참봉이 되어 사도세자의 대의를 신명(伸明)할 때 소제(疏製)를 작성하였다. 시평집(詩評集), 창채시면(滄海時眠)을 저술하였고 유고가 전한다.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