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李級이 禮安鄕校의 校長에게 8월 12일에 시행할 移奉에 관한 의절 등 제반 사항을 11일 저녁에 만나 상의하자는 내용의 편지.
1789년 李級이 8월 12일에 시행할 移奉에 관한 의절 등 제반 사항을 11일 저녁에 만나 상의하자는 내용을 禮安鄕校의 校長에게 전한 편지이다.
처음에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에 바빠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고 하고,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있다. 그리고 그날 본인은 南兄의 집에서 묵었고, 다음날 낮에 열린 堂會에서 제사를 진행하는 임원이 되었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향교의 일을 의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아침에 향교의 노복이 가져온 告目을 보니, 12일의 移奉을 묘시에 한다고 한다. 마땅히 告由文도 있어야 하고, 의절도 갖추어야 하는데, 당일 아침에는 일찍 가도 모양을 제대로 갖추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본인은 7대조인 貞愍公의 기신제에 대비한 散齋 일자가 12일과 겹쳐 있다. 그러므로 11일일 저녁에 향교에 들어가 상의하고자 하니, 상대방과 조카 黃中이 함께 들어와서 주관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霞翁이 멀리 출타하였다고 들었는데, 행사일 전에 돌아올지 모르겠다. 이런 큰 행사에는 그러한 사람이 꼭 있어야하니, 역동서원의 院隸가 가는 인편을 통해 대략 글을 써서 보내주도록 하여, 士光 兄에게 전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머지는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하며 편지를 맺고 있다.
편지의 피봉은 단봉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편지의 발급자는 본문에 '弟級'이라고 적혀 있으며, 貞愍公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李級으로 보인다. 이급(1721~1790)은 본관은 眞城이고, 자는 子明, 호는 聾隱이다. 李瀣의 7대손으로, 부친은 李敏政이다. 1753년(영조 29) 식년시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한 뒤, 관직은 兵曹佐郞, 司諫院正言, 司憲府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수취자는 겉면에 '校長執事, 栢堂候狀'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안향교의 교장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본문에 등장하는 貞愍公 李瀣(1496~1550)는 자는 景明, 호는 溫溪이다. 仁宗朝 大司憲으로 재임 중에 권신인 右議政 李芑를 탄핵하여 파면케 하였다. 1545년 명종의 즉위로 소윤이 득세하자 李芑의 심복인 司諫 李無彊의 탄핵으로 甲山에 귀양 가던 도중 楊州에서 병사하였다. 뒤에 영천의 三峰書院, 예안의 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溫溪集이 있다.
다음으로 '조카 黃中'은 이 간찰의 소장처인 광산 김씨의 인물의 생년을 고려해 볼 때, 金是瓚(1754~1831)로 추정된다. 김시찬은 본관은 光山이고, 자는 黃中, 호는 一一齋이다. 1792년 景慕宮 전례에 관한 일로 영남 유생들과 같이 상경하여 소를 올렸다. 이 때 왕이 金坽의 6대손임을 알고 특명으로 동몽교관에 임명했으나 사은도 하지 않은 채 돌아왔다. 저서로 一一齋集이 있다.
다음으로 '士光 兄'은 당시 안동에 거하였던 金重鉉일 가능성이 높다. 김중현(1729~1809)은 본관은 宣城이고, 자는 士光, 호는 碧山이다. 아버지는 金熺이다. 효행으로 향리의 추중을 받음. 저서로는 碧山遺稿가 전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慶北儒學人物誌』, 한국국학진흥원,영남유교문화진흥원, 영남사, 2008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