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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이영운(李永運)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1+KSM-XF.1789.4717-20090831.0028257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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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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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영운, 김○○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89
형태사항 크기: 28 X 40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천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89년 이영운(李永運) 서간(書簡)
1789년 3월 1일에 이영운이 아내를 잃은 자신을 편지를 통해 위로해 준 상대방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첫머리에는 이영운이 아내를 잃은 슬픔이 절절하게 적혀 있다. 그러던 중 상대방이 먼저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아 종이 가득 자신을 위로해 주는 내용으로 인해 몹시 위로가 되었다며 감사함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재앙 때문에 거듭 가까워서 끼치는 슬픔을 끼쳤다며 미안함도 전하고 있다. 편지 말미에서 이영운은 남아있는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면 진실로 죽은 아내의 원통함을 덜지는 못할 것이나 겨우 살아있는 자신의 슬픔에는 위로가 될 것이라며 어미 잃은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아비의 희망도 전하고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서은주

상세정보

1789년 3월 1일, 이영운이 妻喪을 당한 자신을 편지를 통해 위로해 준 상대방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처삼촌에게 보낸 편지.
1789년 3월 1일에 이영운이 妻喪을 당한 자신을 편지를 통해 위로해 준 상대방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1789년 3월 1일에 이영운이 妻喪을 당한 자신을 편지를 통해 위로해 준 상대방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첫머리에는 이영운이 아내를 잃은 슬픔이 절절하게 적혀 있다. 이영운 자신이 어질지 못한 것 때문에 어진 아내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하였다며 진실로 마치 세찬 불 속에 날아든 나방처럼 그 죽음을 앉아서 보고 한 번도 손을 냄으로써 구원하지 못했으니 죽은 아내가 마땅히 지하에서 울음을 삼킬 것이라며 한탄하고 있다. 또한 10년간의 일들을 추억해보면 한결같이 원통하고 애석하지 않은 데가 없고 또 한결같이 한이 맺히지 않은 데가 없으나 이미 엎어진 물은 전혀 하나도 되돌릴 수 없고 다만 살아 있는 자신으로 하여금 이미 잿더미가 된 마음을 모조리 태울 뿐이니 슬퍼하고 탄식한들 어찌 하겠냐며 슬퍼하고 있다.
이어 이영운은 처상을 당한 것 때문에 상대방을 한번 만나 깊은 원통함을 호소할 수 없어 한번 편지로 대신하여 자신의 마음을 펴서 조금이나마 제 마음의 슬픔을 쏟아내고자 하여 지난번 인편에 편지를 쓰려 했으나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때마다 붓을 던지고 편지 쓰기를 그만두었다고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러던 중 상대방이 먼저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아 종이 가득 자신을 위로해 주는 내용으로 인해 몹시 위로가 되었다며 감사함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재앙 때문에 거듭 가까워서 끼치는 슬픔을 끼쳤다며 미안함도 전하고 있다.
편지 말미에서 이영운은 부친께서는 멀리 밖에서 놀라고 참혹해하시고 늙으신 모친께서는 바로 목전에서 아파하셨으니 생각하면 심신이 정말로 바람 속의 실타래와 같아서 세상의 온갖 일이 진실로 아득하다고 심경을 말하고 있다. 또한 다행히 아내가 이십년 동안의 인간세상에서 얻은 아이만은 보존할 수 있었지만 아이의 두각이 자못 딱딱해지고 커졌고 눈언저리가 밝고 깨끗하여 잘 자랄 것 같은 기미를 띄고 있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태어난 지 겨우 칠일 만에 이미 그 어미의 은택을 잃어버렸으니 매번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창자가 찢어지게 하여 차라리 보고 싶지 않다며 하소연 하고 있다. 그러나 혹 인자한 하늘이 재앙을 뉘우쳐서 남아있는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면 진실로 죽은 아내의 원통함을 덜지는 못할 것이나 겨우 살아있는 자신의 슬픔에는 위로가 될 것이라며 어미 잃은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아비의 희망도 전하고 있다.
李永運[李秉運](1766∼1841)은 조선 후기 문신이다. 字는 際可이고, 號는 俛齋이다. 본관은 韓山이고, 거주지는 安東이다. 조부는 大山 李象靖(1711~1781)이고, 부친은 弘文館敎理를 지낸 艮巖 李埦(1740~1789)이다. 부인은 洛窩 金聖翼(1733~1769)의 딸 光山 金氏이다. 어려서는 조부 이상정의 휘하에서 수학하였고, 1781년(정조 5)부터는 金宗德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문연마에 힘썼다. 1797년(정조 21)에 蔭職으로 惠陵參奉에 제수된 후, 監工司圃別提監察 ‧ 永陵 의 등을 지냈다. 순조 즉위 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후에 다시 咸昌縣監淸安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俛齋集󰡕 5권 3책이 있다.
본문의 정황상 수취인은 이병운의 처 광산 김씨의 부친인 김성익의 형제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다. 상대에 대한 호칭인 '姻叔'의 경우 보통 '고모부' 또는 '사장 뻘 되는 작은아버지'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인숙을 처삼촌으로 봐야 마땅하다. 󰡔光山金氏禮安波譜󰡕에 의하면, 김성익의 부친은 芝厓 金紘(1702~1779)이며 생부는 김굉의 아우인 默齋 金績(1704~1779)이다. 김적의 아들로 書巢 金台翼(1736~1801)과 霽湖 金光翼(1739~1774)이 있는데, 수취인은 이 둘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으나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본문에서 언급한 '이십년 동안의 인간세상에서 얻은 아이'의 경우는 '生甫七日'이라는 말을 통해 이 편지의 발급연도인 1789년에 태어난 아들로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병운1789년 생 아들인 梅窩 李秀應(1789~1864)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서은주, 2차 작성자 :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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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789년 이영운(李永運) 서간(書簡)

姻叔主前上書。省式謹封。
緣我無良。便賢內助。一朝摧折。政如烈炭飛蛾坐視其盡。
而不能出一手以救。死者當飮泣於冥冥中矣。追惟十年間
事。無一非寃惜處。亦無一非恨結處。而已覆之水。萬無一
及。只令有知者。焦盡已灰之腸耳。痛歎何及。遭此以
來。旣不能一造軒屛。仰訴幽寃。政欲一紙替伸。少泄
心裏隱通。而頃便援筆臆塞眼翳輒投管而止。延
蒙手書先施滿紙悲絶。承來又一涕洟也。仍審
靜養體力神衛。眷下諸節均宜。傾慕之至不任悲
慰。惟是由我殃釁。重貽疚傷。顧無辭以仰達耳。
姻姪朞服人。家親遠外驚慘。老慈目下摧傷。覺來心
神。政如風中亂緖。世間萬事儘悠悠。惟是覆巢
餘卵。尙可以存。得二十年人世塵跡。頭角亦頗堅
厚完大。眉目間明秀耿介。亦似留帶氣味。而生甫
七日。已失渠慈母之澤。每見令人腸裂。寧不欲月之
也。倘仁天悔禍。得保殘縷。固無補於死者之寃。而粗
可以慰生者之悲耳。咸兄㶚淚。固可嘆。而政如乞
兒之憐富翁如我不暇致唁。況白登圍卒。遽笞凶
奴之背耶。悲悴者。亦覺慰滿。餘悲撓。不備。伏惟
下鑑。上書。
己酉 三月 初一日。 姻姪朞服人 李永運 上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