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9년 2월 14일에 종제 趙錫喆과 錫穆이 죽은 종형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계부 및 약목으로 시집간 딸과 사위의 소식을 전하면서 만나 회포를 풀고 싶은 소망을 미상의 수신자에게 전하는 위장.
1759년 2월 14일에 종제 趙錫喆과 錫穆이 죽은 종형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계부 및 약목으로 시집간 딸과 사위의 소식을 전하면서 만나 회포를 풀고 싶은 소망을 미상의 수신자에게 전하는 위장이다.
중형이 죽은 것을 한탄하면서 처음 병을 앓을 때 가볍지는 않았으나 마땅히 나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금석같이 믿었는데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느냐고 안타까워하였다. 어버이를 여의고 외롭게 사는 남은 삶에 믿을 것은 형제인데 지금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르니 우리 외로운 이는 어떻게 살지 하늘을 우러르면 가슴이 찢어져 따라죽고 싶으나 그럴 수도 없으니 어찌하느냐고 하였다. 이때의 생활이 어떠하며 日記의 일은 이미 마쳤는지 궁금해 하면서 조용히 여관에 앉아 생각이 고향에 이르면 슬픔과 염려가 마음에 교차하여 편안히 잘 수 없을 듯하다고 걱정하였다.
자신들은 초상의 끝에 마음과 혼이 꺾이어 기운을 잃어 세상사는 재미가 없는 가운데 각 댁의 우환이 위급하여 오직 어진 하늘이 돕기를 바랄 뿐이라고 하였다. 若木으로 시집간 딸의 병은 4, 5일 사이에 여러 병의 증상이 전에 비해 더한 것 같아 지금 약을 쓰고 있는데 의술의 힘을 얻는다면 다행이라고 하였다.
사위의 회시 행차는 이 때문에 망설이는데 병세를 보아 더해지지 않으면 8, 9일 사이에 출발할 계획이나 행구를 마련할 여가가 없어 기한에 맞추어 출발할 수 있을지 기필할 수 없으니 매우 걱정이라고 하였다. 수레가 돌아오는 시기는 언제인지 이처럼 슬프고 정신없을 때에는 만나 회포를 풀 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나 길이 멀어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끝인사를 붙여 마무리 하였다.
발신인 조석철(1724~1799)의 자는 明仲, 호는 靜窩이며, 善經의 아들로 상주사람이다. 權相一에게 수학하여 학문의 방법을 듣고 더욱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1753년(영조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머물렀는데, 學規가 문란함을 보고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정주학에 전념하였다. 이해득실을 도외시하여 오직 수양에 힘썼으며, 다른 한편으로 자제를 모아 소학을 강하고 매월 道南과 涑水書院에서 사서를 강의하였다.
조석목(1726 ~ ?)의 자는 遠仲이며 석철의 아우이다. 1756년(영조 32) 식년시에서 병과 25위로 급제하였다. 1761년(영조 37)에는 주서로 활동하였으며 6품으로 품계를 올려 받았다. 1779년(정조 3)에 獻納으로 재직 중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聖學에 힘쓰고 어진 관리를 등용할 것 등에 대하여 직언하기도 하였다. 1782년(정조 6)에도 충성스럽고 강직한 諫官들을 등용하여 言路를 확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외에도 각종 폐단 등에 대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옛편지 낱말사전』, 하영휘, 돌베개, 2011.12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