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4년 11월 20일, 內從弟 金景漢이 상대 집안의 우환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연이은 과거 합격을 축하하면서, 자신의 쇠병으로 인한 고통과 집안의 우환 등을 전하기 위해 趙生員에게 보낸 편지
1754년 11월 20일에 內從弟 金景漢이 상대 집안의 우환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연이은 과거 합격을 축하하면서, 자신의 쇠병으로 인한 고통과 집안의 우환 등을 전하기 위해 趙生員에게 보낸 편지이다.
소식이 막혀 그립던 가운데 뜻밖에 보내준 두 통의 편지는 감사하며 정양하는 생활이 편하다는 것을 알아 매우 기뻤으나, 仲氏의 고생은 노년에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謹甫의 여러 해 고질병은 손을 쓸 수 없으니, 늘 생각하며 근심하지만 어쩌겠느냐고 안타까워하였다. 영윤의 과거 합격은 기특하고 장하며 수년 동안 여러 차례 소과, 대과의 경사는 餘蔭이 미친 것으로 늘그막의 더할 수 없는 기쁨인데, 하물며 그릇이 원대함을 이룰 사람이어서 더욱 축하한다고 하였다. 가을에 행차 소식이 있어 날을 세며 기다렸는데 뒤늦게 중간에 병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 오래 서운하였다고도 하였다.
자신의 경우는 喪禍의 뒤 끝에 쇠병의 고통은 인간 세상에 다시없는데, 하물며 한 집안의 상화가 갈수록 더욱 혹독해져 재종재가 중풍으로 끝내 일어나지 못했고, 丹砂 제수씨의 오랜 병이 근래 더욱 심해져 변고를 기다리는 중에 있어서 갖가지 근심 적정은 다 말할 수 없다고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春陽의 논을 판 일은 근래 땅값이 매우 낮은 데 비한다면 잘 팔았다고 할 만하여 매우 다행이라고 하면서 끝 인사를 덧붙여 마무리 하였다.
발급자 경한은 자세한 이력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본문에 언급된 '再從弟 景澳'를 통해 義城金氏 가운데 八吾軒 金聲久의 손자 金景漢일 가능성이 높다. 김경한의 부친은 金汝鍵이고, 金景澳의 부친은 金汝鐸으로 그는 김성구의 형 金聲厚의 아들이다. 따라서 김여건과 김여탁은 종형제 사이이며, 김경한과 김경오는 再從 즉 6촌지간인데, 본문에서 '재종제'로 언급한 것이 일치한다. 김경한의 형제 및 사촌들 가운데 이력을 알 수 있는 인물로 金景瀗(1690~1744) 등이 있는데, 그의 생몰년을 통해 이 편지의 발급연도를 1754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은 奉化 海底에 거주하였다.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