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1년 11월 24일에 呂文周가 이명[耳吼]을 앓는 근황을 전하면서 자신과 아이들이 질녀의 혼사에 참석할 수 없는 사정을 趙生員에게 알리는 편지
1751년 11월 24일 呂文周가 이명[耳吼]을 앓는 근황을 전하면서 자신과 아이들이 질녀의 혼사에 참석할 수 없는 사정을 趙生員에게 알리는 편지이다.
인편이 온 뒤로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막혀 염려가 되었는데 그간 조리하는 체후가 어떠한지 이따금 그리움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병의 상황이 전과 같은데 이명[耳吼]이 전보다 심하여 15첩의 약을 먹었으나 조금의 효과도 없고 괴로움만 더할 뿐이니 어찌하느냐고 하였다. 질녀의 혼사가 1, 2일이 남았으니 이미 준비를 하였겠으나 병든 누이가 밤낮의 근로로 흉통이 더해져 떨치고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눈앞에 삼삼하여 우려의 마음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추운 날씨를 만나 몸의 병이 이와 같아 가서 보지 못하고 다만 마음만 쓰고 있으니 한탄한들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다. 아이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달려가야 하지만 스스로 거리끼는 일이 많아 임시에 가니 보통의 손들과 다름이 없으니 이 또한 탄식할 만하다고 하면서 혼사를 잘 치르기를 바라면서 마무리 하였다. 영천 사돈의 凶報가 오늘 아침에 이르러 놀랍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으며 맏이가 이 때문에 걸음을 멈추게 되었으니 도리어 섭섭하다는 추신이 붙어 있다.
발신자 여문주(1683~1767)의 본관은 星山, 호는 菊窩이다. 일찍이 문학에 뛰어났고, 계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양사당을 중수하여 학풍을 진작시켰으며, 국내 명승지는 두루 편력하였고, 작고 후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옛편지 낱말사전』, 하영휘, 돌베개, 2011.12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