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5년 2월 27일, 內再從弟 權萬이 先塋 근처의 토지 매입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趙生員 公州宅에 보낸 편지
1745년 2월 27일에 內再從弟 權萬이 先塋 근처의 토지 매입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趙生員 公州宅에 보낸 편지이다.
하인이 와서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으며 병환과 초상 및 우환의 소식에 걱정과 탄식을 했다고 첫 인사를 하였다. 達田의 밭에 관한 일은 양쪽 선영을 수호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아 털끝만큼도 희롱할 뜻이 없는데 편지를 보고 괴이함과 한스러움을 이기지 못했다고 하였다. 자신은 이 밭에 대하여 산소에서 멀지 않은 땅이고 외가에서 판 토지여서 차마 남의 손에 넘길 수 없으니, 貴奴가 오고 가며 값을 깎아 오기를 바랐는데 지금 값이 어긋나 그대로 값을 치르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자신이 전에 듣기에는 토지의 수환은 2, 3섬에 이르렀고 값은 100여 金에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귀노와 庶叔이 가서 보니 토지의 수확은 몇 10 말[斗]에 지나지 않았고 값은 수 30 금에 지나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면서 뒷날 어찌 마주하여 실제를 살필 길이 없겠느냐고 하였다.
이 토지의 값은 35貫으로 決折하였으나 자신의 집에는 한 푼도 없어 겨우 30관을 빌려서 보내며 5관은 곧 갖추어 보내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추신이 붙어 있다.
발급인 萬은 江左 權萬(1688~1749)으로 추정하였다. 권만의 부친은 權斗紘이고 모친은 풍양조씨 趙啓胤의 딸인데, 수취인이 조계윤 종형제의 아들이라면 본문에 언급한 '內再從-外再從' 관계가 될 수 있다. 권만은 본관은 安東, 자는 一甫, 호는 江左이며 密庵 李栽의 문인이다. 霽山 金聖鐸, 大山 李象靖 등과 교유하였다.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