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3년 9월 그믐날, 손제 권성이 김생원을 포함한 그의 형제들에게 그리운 마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근황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1693년 9월 그믐날, 손제 권성이 그리운 마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근황을 알리기 위해 김 생원을 포함한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먼저 발급인은 지난번 여러 날 만나 함께 있다가 갑자기 헤어져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마 상대방도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하면서 이 편지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권성은 영현에 와서 머무르고 있으면서 편지를 썼는데 날씨도 비까지 내리니 객지에 있는 나그네의 마음이 어떠하겠냐고 하면서 처량한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뒤에 자신은 부평초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느라 김 생원 및 그의 형제들을 만날 기일을 놓쳐버릴 것 같아 당신들이 그립고, 미리 서운하며 아득하다고 하였다. 추록 부분에 명구 형에게는 바빠서 각기 편지를 쓰지 못했으니 이 편지를 함께 봐 달라는 당부도 했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권성(1637~1713)은 본관은 醴泉, 자는 明仲이며, 호는 遯軒, 부친은 國柱이며, 모친은 咸陽朴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였고 특히 서법에 능하였다. 拙齋 權五紀(1463~1533)의 후손이다. 1657년 한성시에 올라 이듬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학문이 뛰어나, 성균관 학생의 존경을 받았으나 끝내 전시에 오르지 못했고 관직을 받지 못했다. 1683년 모친이 돌아가신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둔헌을 짓고 은거하였다. 유고가 전하며, 淸臺 權相一(1679~1759)이 쓴 행장 「遯軒權公行狀」이 남아있어 그의 행적을 살피는 데 참고가 된다.
추록 부분에 나오는 '명구 형'은 金鏞(1657~1732)인데, 본관은 光山, 자가 鳴久, 호는 六有齋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며 학자이다. 아버지는 진사 輝斗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이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시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六有齋集』이 있다.
이 편지의 피봉은 단봉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피봉에 발급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謹拜上'만 기록되어 있으며, 수취인은 '老兄 金生員 聯璧 下史'라고 되어있다. '聯璧'은 귀한 집 형제들을 뜻하며, '下史'는 편지 봉투에 수신자의 이름을 직접 쓰는 것은 실례이므로 그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을 지칭함으로써 상대방을 높이고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문집해제』12, 한국국학진흥원, 도서출판 성심, 2009
『옛편지낱말사전』, 하영휘 외, 돌베게, 2011
『慶北儒學人物誌』, 한국국학진흥원,영남유교문화진흥원, 영남사, 2008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