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2년 22일, 鄭東耈가 상대가 보내준 편지에 대해 감사해 하고,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기 위해 오작당 문중의 미상의 수신자에게 보내는 편지
1692년 22일에 鄭東耈가 상대가 보내준 편지에 대해 감사해 하고,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기 위해 오작당 문중의 미상의 수신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전에 金都事가 부친 문안을 통해 형의 이름을 보고 얼굴을 대한 듯하여 이따금 펼쳐보고 마음이 뚫렸다고 첫인사를 하였다. 또 정이 담긴 편지를 받으니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고 기뻐하면서, 형의 하늘을 품은 정의가 아니면 어찌 천리 밖에서 마음속을 서로 비추어 보는 것이 이런 지경에 이르겠느냐고 감탄하였다. 각자 노경에 있어 울적함을 펼 기약이 없어 생각하지 않아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하면서, 조물주가 혹시 잊지 않게 하여 한 번 만난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은 많은데 말을 마치고 북쪽을 바라볼 뿐이라며 정으로 살펴달라는 끝인사를 붙여 마무리 하였다.
발신자 東耈는 이력이 자세하지 않다. 풍양조씨 오작당 소장문건 가운데 무인년에 발급된 '鄭東耈의 서간'이 있는데, 이를 통해 그의 성씨가 鄭氏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정동구는 『고문서집성 25 –덕천서원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에 수록된 『德川院生錄』七의 "辛亥(1671) 十二月日院錄" 조에 "鄭東耈 春卿"이 기록되어 있으며, 『燃藜室記述』제33권 「肅宗朝故事本末」의 "丁巳(1677)增試廣題事"에는 "咸安幼學鄭東耈疏略…"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정동구는 경남 함안에 거주하였고, 직역은 幼學이며, 자는 春卿인 인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편지의 발급연도인 임신년도 숙종연간인 1692년으로 유추하였다.
수취인 정보의 경우 피봉으로 생각되는 부분의 끝에 묵서된 흔적은 발견되나 이 문건이 간찰첩의 일부로 엮여있고, 피봉의 대부분이 책의 접합처에 장정되어 정확한 내용을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끝부분의 글자를 "事"로 유추할 수 있는데, 다른 문건들을 감안하면 "趙都事"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와의 관계를 표현한 "心記"라는 용어는 '마음으로 기억 해 줄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을 의미하여 至親의 관계는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1차 작성자 : 정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