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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김해일(金海一)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1+KSM-XF.1678.4790-20090831.00282570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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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해일, 김휘세
작성지역 경상북도 예천군
작성시기 1678
형태사항 크기: 21.7 X 30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천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678년 김해일(金海一) 서간(書簡)
1678년 6월 18일에 김해일변무겸절사서장관이라는 임시직 관직에 임명되었음을 알리고 길을 떠날 때 사용할 노자와 경비를 지원 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용궁 현감에 재직 중이던 김휘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관직의 명칭 가운데 '변무'는 잘못된 기록이나 말 등에 대한 변론을 제기함을 의미한다. 당시 중국에서 기록한 역사책에 조선의 왕인 인조에 대한 기록을 잘못 해 놓은 부분이 발견되어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숙종이 그것을 고쳐달라고 요청하는 사신을 중국에 보내었다. 이 때 김해일은 이 사신단원의 일원으로서 기록 등을 담당하는 '서장관'의 직책과 임무를 띠고 중국을 다녀왔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김동현

상세정보

1678년 6월 18일, 檀溪 金海一卞誣兼節使書狀官에 차임되었음을 알리고 노자 비용을 요청하기 위해 용궁 현감에 재직 중이던 金輝世에게 보내는 편지.
1678년 6월 18일에 檀溪 金海一卞誣兼節使書狀官에 차임되었음을 알리고 노자 비용을 요청하기 위해 용궁 현감에 재직 중이던 金輝世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처음 지방관 임무 수행 중인 상대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변무겸절사서장관에 차임되었음을 알리고는 떠날 날이 머지않았기에 노자를 때에 맞추어 넉넉히 도와주기를 부탁하였다. 마지막으로 잘 살펴 달라는 말로 인사를 하고 끝맺었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김해일(1640~1691)은 자는 宗伯, 호는 檀溪 또는 檀谷, 본관은 禮安이다. 부친은 金鍴이며 金兌一의 아우이다. 醴泉에 거주하였다. 1660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하였고, 1663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66년 이후로 持平, 正言, 獻納, 執義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특히 숙종 때에 인조 변무의 일로 書狀官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이력이 있다. 이 편지는 바로 이 시기에 발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左承旨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檀溪集󰡕이 전한다.
이 편지의 피봉은 단봉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취인 정보 및 편지를 올린다는 뜻의 '謹上狀', 봉합처에 着名 또는 '省式' 등의 용어가 생략된 '謹封'이 기록되어있다. 수취인에 관한 정보로는 '龍宮牙下史'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문건이 '광산김씨 설월당' 문중의 문건임을 감안하여 발급연도 즈음에 용궁 현감을 지낸 인물을 추정해 보면 松坡 金輝世일 가능성이 높다. 󰡔光山金氏禮安派譜󰡕에 의거하면, 김휘세(1618~1690)는 자는 應時, 호는 송파, 본관은 광산으로 조부는 雪月堂 金富倫(1531∼1598), 부친은 溪巖 金坽(1577∼1641)이다. 遺逸로 천거되어 敎官에 임명된 이후 工曹佐郞龍宮 縣監 등을 역임한 이력이 있다.
󰡔숙종실록󰡕에 의거하면, 숙종 2년에 仁祖 때의 事蹟이 󰡔明史󰡕에 잘못 기록된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리고 숙종 3년에는 변무에 관한 사신단을 꾸리는 것에 관한 기사가 있다. 그리고 󰡔연려실기술󰡕 권31 「현종조고사본말」에는 '무오년(1678)에 동지사겸변무사 福平君 , 閔黯, 金海一'이 사신으로 淸에 갔다가 와서 吳三桂의 청에 대한 반란 경과를 아뢰는 기사가 있다. 이러한 기사들을 통해 당시 김해일이 차임되어 수행했던 변무에 관한 일은 인조대의 사적이 중국 측 기록에 오기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편지로 당시 외국으로 가는 사신에 임명되어 떠나는 경우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지방의 관아에서 노자를 얻었다는 사실을 단편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숙종실록󰡕에 의거하면 김해일1678년 4월에 헌납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6월 21일에 또 헌납에 제수되는 기사가 있다. 약 2달간의 경과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편지의 발급월일인 6월 18일 즈음에는 서울에서 관직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그의 고향인 예천에 거주하고 있다가 이 관직에 제수되어 당시 용궁 현감이었던 김휘세에게 노자를 요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편지는 일반적인 안부 편지와는 달리 투식적인 인사치레 등을 거의 생략하고 자신의 용건을 간략히 적고 있다. 읽는 순서는 처음 맨 우측 '伏惟'에서 내용이 시작되며 좌측으로 내용이 진행되고 맨 좌측에 연월일과 발급인의 성명을 기재하였다. 상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擡頭 또는 隔字를 약 3번 사용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숙종실록』,
『연려실기술』권31「현종조고사본말」, 李肯翊,
1차 작성자 : 김동현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78년 김해일(金海一) 서간(書簡)

龍宮牙 下史。
謹上狀。
謹封。
伏惟
尊政候佳勝。海一。蒙差卞誣兼節
使書狀官
。發行不遠。路資趁期
優助。幸甚。不宣。伏惟
尊照。上狀。
戊午 六月 十八日。金海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