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8년 7월 22일 김서국이 당시 용궁현감으로 부임해있던 김휘세에게 業儒 문제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전하고 더불어 보내주신 물품을 잘 받았다고 알리기 위해 쓴 편지.
이 편지는 金瑞國이 인근의 龍宮 수령에 부임해 있던 재종조부 金輝世에게 쓴 편지이다. 첫머리에 지난 번 갑작스런 아버지의 방문 때 재종숙부인 김휘세의 편지를 전해 받고 그의 안부를 알게 되어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業儒'의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김서국이 거주하는 안동 예안 쪽에 이 業儒 문제로 논의가 분분하고 부포리 쪽은 그 분분함이 더욱 심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자신만은 業儒라는 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면했으므로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業儒'는 '幼學'에 상대되는 말로, 서얼의 문과 응시를 허락하면서 士族과 구별하기 위해 서얼이 문과에 응시할 때 사용하도록 한 직역이다. 유학은 사족이 사용하는 직역이다. 자세하게 쓰지 않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당시까지 '업유'의 용어가 공식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로 보인다. 1708년에서야 서얼 자신의 一代만 業儒 · 業武라 하고, 그 아들 대부터는 幼學으로 부르게 조치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1745년에 나온 속대전에 그대로 실렸는데, 그 뜻은 아들 대부터는 양반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올해 작황이 꽤 좋아서 백성들의 생활이 그나마 펴질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을걷이 전까지는 연명이 쉽지 않아 매우 걱정스러워 하였다. 그리고 김휘세가 용궁에서 보내준 종이와 먹, 부채도 감사하게 잘 받았다고 전하였다.
편지를 보낸 김서국은 설월당 김부륜의 동생 김부생의 고손자로, 증조부는 金塘이고, 조부는 金光赫이며, 부친은 金碯이다. 김휘세는 김서국의 조부 김광혁과 사촌형제 간이므로, 곧 재종조부가 된다.
편지를 받은 김휘세(1618~1690)는 본관이 光山, 자는 應時, 호는 松坡로, 조부는 雪月堂 金富倫(1531~1598), 부친은 溪巖 金坽(1577~1641)이다. 행실이 독실하여 士林의 重望을 받았으며, 工曹佐郞과 龍宮縣監을 역임하였다. 현재 다른 저술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艮翁 李獻慶(1719~1791)이 쓴 김휘세의 묘갈명 즉 「贈承政院左承旨松坡金公墓碣銘」(艮翁集 중)이 전하므로 그의 행적을 살피는데 어느 정도 참고해 볼 수 있다.
『艮翁集』, 李獻慶,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1차 작성자 :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