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5년 8월 3일, 황전이 서늘한 가을을 맞아 상대방의 근황에 대해 묻고 딸의 안부를 묻기 위해 사돈인 도산서원 원장을 지낸 김휘세에게 보낸 편지.
1675년 8월 3일, 黃橏이 서늘한 가을을 맞아 상대방의 근황에 대해 묻고 딸의 안부를 묻기 위해 사돈인 도산서원 원장을 지낸 김휘세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발급인은 이 서늘한 가을에 복중에 있는 상대방의 안부가 어떠한지 묻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다. 이어 장사치를 산은 이미 정해졌는지 물었다. 자신과 상대가 서로 소식이 막힌 지 반달이 지났으니 그리움이 곱절이나 된다고 전한다. 뒤에 자신의 근황과 안부를 전하는데, 지난달 20일 이후부터 거듭 감기가 걸렸고, 설사증이 겸하여 발생하여 회복될 기약이 없다고 하면서 고민한들 어찌하겠냐고 말하였다.
편지 중간 부분에 딸아이의 안부를 묻고 있는데, 여기서 시댁에 있는 여식을 말하는 것으로 발급인은 수취인 김휘세와 사돈이 됨을 알 수 있다. 딸아이에게 우선 아무런 일이 없다고 하지만 걱정이 되어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한번 하 인을 보내서 딸아이에게 안부를 묻는 것이 정리 상 당연한 것이지만, 자신의 병고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사람을 보내니, 탄식하고 탄식한다고 하면서 편지의 끝을 맺고 있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황전은 金光繼(1580∼1646)의 『梅園日記』가운데 "暫歇, 夜又作痛如昨, 夜不得眠曉, 豐基儒生黃橏來而不得見."이라 한 부분에 '풍기 유생 황전'이라고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로써 그의 거주지가 풍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광산김씨예안파보에 의하면 그의 본관은 檜山이고, 부친은 主簿 黃益淸이다.
이 편지의 피봉은 단봉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피봉에 발급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수급자만 기록되어 있는데 '金院長 服前'이라고 되어있다. 당시 도산서원 원장은 金輝世가 지냈으므로 김 원장을 김휘세로 본다. 김휘세(1618~1690)는 본관은 光山, 자는 應時, 호는 松坡로 金坽의 아들이다. 행실이 근검하고 독실하여 당시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벼슬은 공조좌랑, 용궁 현감을 역임하였다. 청렴결백하였고, 특히 수령으로서의 본분보다 사서를 강론하는 것에 치중하였다. 李獻慶이 찬한 묘갈명이 남아있어 그의 행적을 살피는데 참고가 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