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5년 윤5월 10일, 남천택이 자신의 여식의 병세를 듣고 상대에게 여식을 보내주실 것을 간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
1675년 윤5월 10일, 南天澤이 여식이 병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자기가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여식을 자신에게 보내줄 것을 간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더위가 심한 요사이에 상대방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지 안부를 묻고 있다. 이어서 여식의 병이 심하여 회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신께서 여식을 보내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 자신은 관직을 제수받아 15일에 서울에 올라갈 계획이었으나 여식이 14, 15, 16일이 오기 좋은날이라고 하니 당신께서 여식을 보내주신다면 하루, 이틀 정도를 미루어 딸을 만나보고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은 관직에 제수된 것이 이미 오래되어 일이 급한데 또 며칠을 미루게 되었다며 상대방을 재촉하고 있다. 추록에서는 자신이 비록 없더라도 자신의 형이 집에 남아 여식의 병을 치료할 것이며 朝報는 보내드렸지만 상소와 箚子는 다른 사람이 빌려가서 자신에게 없다고 하고 있다.
남천택(1619~1684)은 본관은 英陽, 자는 蘇宇, 호는 苔巖이다. 할아버지는 南隆達이며 아버지는 南礏이고 宋福基의 외손이다. 1648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예조 정랑, 호조 참의, 충청 도사, 경주 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당쟁에 염증을 느껴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수급자는 피봉에 金院長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金輝世가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金碩昌이 남천택의 사위가 된 점을 보았을 때 金院長은 김휘세로 생각된다. 김휘세(1618~1690)의 본관은 光山, 자는 應時, 호는 松坡로 金坽의 아들이다. 당시 사림의 重望을 받았으며 벼슬은 공조 좌랑, 용궁 현감을 역임하였다.
이 편지는 안동지역 양반들의 교유관계를 알 수 있는 기본 자료로서 풍산김씨 가문과 영양남씨 가문의 혼맥으로 연결되었으며 이를 통해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