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0년 윤2월 11일, 舊弟 懲庵 尹深이 金進士와 生員 형제에게 보낸 안부 편지
1670년 윤2월 11일에 舊弟 懲庵 尹深이 金進士와 生員 형제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이 편지는 윤심이 김진사와 생원 형제에게 안부를 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해 金生으로부터 형들이 어버이의 대상을 치러 복을 변제한 지도 오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수와 도의를 다하지 못하여 유감스럽다고 하였다. 형들의 기거는 편안한지, 자제들은 어떻게 자랐는지도 물었다. 윤심은 1669년 겨울 부친의 묘소 이장을 마무리했다고 했다. 무덤이 불길하여 자손이 쇠락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몸도 쇠약하여 앞으로의 만남을 기약할 수 없어 그리움만 더할 뿐이라고 하였다. 李仲思가 서울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山陰에 있을 적에 형과 더불어 교분이 두텁다고 했으니 애도를 표한다고 하였다.
편지의 앞부분에는 일반적으로 계절, 날씨 등과 안부를 묻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편지는 수신자 김진사와 생원 형제의 부모상 소식을 뒤늦게 듣고 도의를 다하지 못한 아쉬움을 먼저 나타낸 뒤에 김진사를 비롯한 가족의 안부를 묻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에는 편지의 일반적인 양식인 '伏惟僉情亮', '謹拜上狀' 등으로 끝냈다. 편지의 작성 월일은 '閏月 十一日'로 표기되어 있는데, 1670년의 '閏月'은 2월달이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윤심(1633~1692)의 자는 玄通, 호는 懲庵, 본관은 坡平이다. 증조부는 도승지 尹覃茂이고, 조부는 觀察使 尹知敬이다. 부친은 參判 尹鏶이며, 知中樞府事 金藎國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66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弘文館正字가 되고 副校理, 副修撰, 吏曹佐郞을 거쳐서 1674년 大司諫이 되었다. 다음해 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679년 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西人이 추방당하자 工曹判書로 기용되고, 이어 兵曹判書를 거쳐 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隸書에 뛰어났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