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년 8월 5일에 安東府使 李尙伋이 金坽에게 쓴 안부편지
1624년 8월 5일에 安東府使 李尙伋이 金坽에게 쓴 안부편지이다.
김령이 위문에 사례를 표하면서 백성들을 노엽게 한 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겸사를 표하는 한편, 조보를 통해 김령이 刑曹佐郎이 되었다고 알렸다. 자신이 부친의 기일을 맞아 令胤과 회포를 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나머지 내용은 줄였다.
백성들을 노엽게 한 사건은 『계암일록』 1624년 7월 30일 일기에 나타난다. 안동에서 무뢰한이 밤에 횃불을 들고 향교 뒷산에 올라가 안동부사를 꾸짖고 욕한 일로 감사가 듣고 안동부사를 파직시켜 내쫓으려는 의도로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이상급(1572~1637)의 본관은 碧珍, 자는 思彦, 호는 拙夫, 習齋이고, 시호는 忠剛이다. 白沙 李恒福(1556~1618)에게 배웠다.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扈從했다가 형 李尙吉이 순절했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강화로 가던 도중에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충강공신도비명이 있으며, 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김령(1577~1641)은 본관은 光山, 자는 子峻, 호는 溪巖, 시호는 文貞이다. 부는 縣監 金富倫이며, 모는 平山申氏 副護軍 申壽民의 딸이다. 禮安 烏川에 거주하였다. 1612(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하여 主書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비관해 낙향하였다. 죽을 때까지 마지막 20여 년 간은 문 밖 출입을 삼가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내, 세상에서 영남의 제1인이라고 불렀다. 문집으로 『溪巖集』 6권이 있고, 일기인 『溪巖日錄』이 전한다. 해당 편지를 받은 사실은 『계암일록』 1624년 8월 5일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박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