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3년 2월 3일, 이호민이 새해에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1613년 2월 3일, 李好閔이 새해에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이호민은 먼저 새해에 당신에게서 안부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주셨는데 감사함을 느끼고 상대방께서도 새해를 맞이해 잘 지내고 계신지를 묻고 있다. 이어서 자신의 집안은 여러 가지 변고를 당했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호민은 대제학과 좌찬성을 지내고 1604년 扈聖功臣 2등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광해군일기』를 살펴보면 1612년 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어 3월 11일 파직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1613년 에는 그의 婢妾과 그의 사위 宋民古 몰래 간통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아마도 위의 일들이 집안의 여러 가지 변고로 생각된다. 이어서 편지는 문숙이 설이 되기 전에 노비를 보내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이으려고 하였지만 수령의 명이 엄해서 이틀 동안 성 주위를 맴돌 뿐 성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으며 자신과 관련된 일은 이미 한림원 관리를 불러 물어보고 이미 보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하며 자신의 상황을 상대방에게 전하고 있다.
발급자인 이호민(1553~1634)은 본관은 延安, 자는孝彦, 호는 五峰, 南郭, 睡窩이며 延安君 李淑琦의 증손이다. 1584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1599년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판서로 대제학, 좌찬성을 지냈고 1604년 扈聖功臣 2등으로 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 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고, 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된다는 立長論을 주장하였다. 1612년 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된다. 인조반정 후 舊臣으로 우대를 받았고, 죽은 뒤 청백리에 올랐다. 시호는 文僖이다.
이 편지를 통해 1613년 癸丑獄事로 복잡해진 정계 속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사료가 될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