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년 예천 용궁의 李潤壽가 봉화 현감 金富倫에게 환곡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
이 편지는 1594년(선조 27) 예천 용궁의 李潤壽가 봉화 현감 金富倫에게 환곡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편지는 안부 인사로 시작하였다. 편지의 작성이 정월인 만큼 따뜻한 봄날 기거는 평안한지 물었다. 이윤수가 김부륜에게 인사를 드리고자 하였으나 基川(풍기의 옛 지명)에서 竺山(용궁의 옛 지명)으로 돌아오는 도로가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아울러 춘궁기에 집안에 곡식이 없으니 환곡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 약속한 기일을 앞당겨 갚을 계획이라고 적었다.
환곡이란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평시에 양곡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대여하고 추수 후에 회수하는 것인데, 義倉 소관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의창의 元穀이 부족하여 무명무실하게 되었으며, 물가조절 기관인 상평창이 이를 대신하였다. 환곡은 회수할 때 10%정도의 이자를 함께 받는데, 이것이 점차 고리대로 변하여 갔고 田稅 수입이 부족하게 되자 환곡은 국가재정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아울러 번질(反作, 허위장부 작성), 가분(加分, 사사로운 대여), 분석(分石, 겨와 돌을 섞음), 허류(虛留) 등의 폐단이 심하여 조선후기 민란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편지의 작성자 이윤수(1545~1594)는 용궁면 무이리 무리실 사람으로, 호는 滄菴, 본관은 驪州이다. 元忠의 아들이고, 西厓 柳成龍의 매부이며, 淸風子 鄭允穆(1571~1629)의 장인이다. 대구 파동에서 태어났으나, 무리실에 사는 고모부 白震陽이 후손 없이 돌아가시자 생활 터전을 이어받아 무리실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평소 초야에 머물며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때는 향리의 굶주린 백성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선조 때 漢城府 右尹에 추증되었으며, 무덤은 풍양면 청운리의 靑獅山에 있다. 후손들은 무덤 주변에 追遠齋(1630년 이전)를 건립하고, 무리실에 武夷祠(1619)를 세웠으며, 무이리 소천에 滄庵亭(1915)을 창건하여 이윤수의 학덕을 추모하고 유지를 받들었다.
편지의 수취인 김부륜은 退溪 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2년(선조 5) 遺逸로 천거되어 集慶殿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5년(선조 18)에 전라도 同福 縣監으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수하고 봉급을 털어 서적 8백여 책을 구입하는 등 흥학에 공헌하였으며, 學令 수십조를 만들어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鄕兵을 도왔고, 봉화 현감이 도망가자 假縣監이 되어 선무에 힘썼으며, 경상도 관찰사 金睟에게 적을 막는 三策을 올리기도 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 烏川에 '雪月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雪月堂集 6권 3책이 전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