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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이숙량(李叔樑) 격문(檄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1+KSM-XF.1592.0000-20090831.002326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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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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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격문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격문
작성주체 이숙량
작성시기 1592
형태사항 크기: 28 X 40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가송 영천이씨 농암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592년 이숙량(李叔樑) 격문(檄文)
1592년 일본이 침략하자 예안이숙량이 작성한 격문으로,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예의를 강론하며 임금을 존중하고 백성을 비호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겠다는 마음을 길렀다고 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왜적이 온 나라를 짓밟아 우리 임금을 근심시키고 욕되게 하며 우리 백성을 해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하면서 모든 선비들은 적을 죽이는데 힘써야 하니, 이 격문을 받으면 지체하지 말고 전하라고 하였다.
『옛편지 낱말사전』, 하영휘, 돌베개, 2011.12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1차 작성자 : 김명자

상세정보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李叔樑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해 쓴 격문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李叔樑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해 쓴 격문이다.
인심이 예스럽지 않아 임금을 친애하고 윗사람을 위해 몸을 바칠 줄 모르는 것이 큰 우환이니 이러고도 오히려 나라를 지키고 적을 막는 것을 바라겠느냐고 하였다. 우리들은 詩書를 이야기하고 예의를 강론하며 항상 임금을 존중하고 백성을 비호하겠다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는데, 오늘에 이르러 왜적이 온 나라를 짓밟아 우리 주상을 욕되게 하며 백성을 해치는 것을 목격하게 되니 무슨 낯으로 구차히 살겠느냐고 하였다. 임금이 몽진을 떠나고 백성들이 주륙을 당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正氣가 사라진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모든 선비들은 적을 죽이는데 힘써야 하니 이 격문을 받으면 지체하지 말고 전하라는 내용이다.
통문을 보낸 이숙량(1519~1592)의 본관은 永川, 자는 大用, 호는 梅巖으로 호조참판 李賢輔의 아들이다. 일찍이 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문장은 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였다고 한다. 1543년(중종 3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科業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만 치중하였는데, 후일 천거에 의하여 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기도 하였으나 난중에 죽었다. 대구의 硏經書院에 제향 되었다.
『옛편지 낱말사전』, 하영휘, 돌베개, 2011.12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1차 작성자 : 정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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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이숙량(李叔樑) 격문(檄文)

禮安通文 右壬辰年事 汾川進士李叔樑

禮安進士李叔樑等。沬血飮泣。謹告于四隣同心同德之人。嘗謂守國不在城
郭兵革。而在於得人。禦敵不在富強威武。而在於奮義。此固平日之雅言。
人孰不知。而豈意今日眞知其如此。而目見其驗耶。今之城郭兵食。非不
完且富也。士卒器械。非不多且精也。而倭船才到。望風奔潰。雄藩巨鎭。一
時䧟沒。大小居官者。無一人出力拒戰。賊勢風騰。如入無人之境。纔經一旬。
奄及都城。思之氣塞。言亦涕橫。人皆以百年昇平。不識兵革之所致。或
諉諸天數。非人謀所及。此皆徒知其末。而不知其本者也。愚以爲末世淆
漓。人心不古。惟知一身利害之迫切。而不念親上死長之爲何事。此正今日
之大患也。尙何守國禦賊之可望乎。嗚乎。我國家休養人才。修講軍政。
不知幾年。而直至今日。孤城一皷。萬官失守。乘輿蒙塵。社禝稷爲墟。百萬蒼
生。爲魚爲肉。如在鼎沸之中。而所云方伯連帥者安在。兵使水使者何歸。
嗚乎。小民之所依歸者卅縣。守令之所統屬者方伯閫帥。而今也方伯先自畏㥘。
鼠竄山谷。閫帥不接鋒刃。唯知逃遁。守令蕩盡官儲。脫身逃走。此固萬
民之蒼黃奔走。托死無所者也。嗚乎。古今天下。勝敗興亡。何代無之。以堂
堂全盛之國。困於萬里海外之寇兵。未相交而遽至於此者。披之方冊。復有
如今日者乎。此實吾東方萬古莫大之羞恥。而究其所由。則其不在於國無人
焉。正氣掃地者乎。吾䓁沐浴菁莪之化。涵泳鳶魚之澤。談詩書。講禮
義。常以尊主庇民孝親敬長爲心。至於今日。目撃漆齒之徒。蹙踏一國。
憂辱我主上。戕賊我生靈。亦已甚矣。擧目山河。慘不忍見。尙復何顔。
偸生苟活於戴履之間哉。與其寄身兵燹之中。凜凜如不克自全。
曷若各自振勵。上慮君父之困辱。下念生民之危迫。常勵枕戈臥薪
之志。合萬人爲一心。約千里爲一家。憤膽張拳。指天誓日。無復以入山投
林爲計。日以荷戈死敵爲務。賊入我境。戮力赴鬪。以雪君父之恥。而不知
有其身可也。不幸而至於死。不作倭奴之奴。而得爲朝鮮之鬼足矣。而况
人各有此心。孰不知此之可安。而至今不相爲謀者。難於家到而戶說。如在
焚林之上。而尙不爲之處。亦可哀矣。往不可追。來者可勉。縱恨失之於東
隅。猶可奮翼於桑楡。今我一縣章甫倡義。無一遺者。凡我同志聞
此一言。則吾知固有之心油然興起。不啻影響之捷矣。以之守鄕。則一邑
可存。四隣効之。則列邑可保。推之一國。無不同然。則苞桑之固。盤石
之安。庶可自此而可望。豈但一時之幸免。實保萬世之長策也。况今大盗有
摧敗之漸。而零星㪚賊。無異破竹之勢。不煩大擧。而尙可勦除。自
今以往。百分出氣。見文即傳。無滯一刻。一紙朝馳。千騎夕至。此誠臨亂
應變之一大奇策。尙可爲緩而忽之哉。
右書出永川郡華北面橫溪洞虒叟翁七代係鄭載穆家藏
謄草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