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1년 7월 22일, 鄭淑男이 관직을 제수 받은 일을 전하기 위해 金富倫에게 보내는 편지
1581년 7월 22일, 鄭淑男이 관직을 제수 받은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 金富倫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 내용으로는, 괴로운 가을 더위 중에 상대방을 그리워하던 중에 편안하게 지낸다는 편지를 받게 되어 고맙고 위로되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이어서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자신은 집안에 우환이 거듭 겹쳐서 힘들게 지내고 있던 중에 뜻밖에 분수에 넘치는 벼슬을 받게 되어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하면서, 언제 상대방의 가르침을 받아서 낭패를 면하기를 몹시 바란다고 하였다. 끝으로, 손상된 비장과 위는 잘 조섭하고 있지만 부기가 가볍지 않아서 걱정스럽다는 추록을 덧붙였다.
이 편지의 피봉 중 수취인 란에 '金奉事宅'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여기서 김참봉은 雪月堂 金富倫(1531~1598)이다. 김부륜은 자가 惇敍, 호는 설월당, 본관은 光山이다. 부친은 濯淸亭 金綏(1491~1555)이고, 형은 山南 金富仁(1512~1584)·養正堂 金富信(1523~1566)이며, 아들은 溪巖 金坽(1577~1641)이다. 退溪 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 式年試 2등으로 생원에 입격하고, 集慶殿參奉·敦寧府奉事·同福縣監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雪月堂集이 전한다.
그리고 피봉 아래쪽을 보면 '鄭監司淑男書'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아 발급인은 감사 직을 지낸 鄭淑男(1541~1599)임을 알 수 있다. 정숙남은 鄭淑夏의 초명으로, 편지를 보낼 당시에는 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명을 사용하고 있다. 정숙남의 자는 景善, 호는 月湖, 본관은 東萊이다. 부친은 鄭謇이고, 아우는 鄭淑度이며, 1564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입격하고, 1572년 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淸州牧使·同副承旨·右副承旨·左承旨·兵曹參議·刑曹參議 등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군공이 있어 宣武功臣에 책록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 중에서 정숙남은 자신이 관직을 제수 받은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선조실록』을 살펴보면 이 편지를 보낸 다음 달인 8월에 정숙남이 正言으로 활동하였던 기록이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간찰의 내지를 쓸 때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두고 적기 시작하여 상하의 여백과 행간에 회문 형식으로 사연을 적지만, 이 편지의 경우에는 내용이 길지 않기 때문에 회전형식에 이르지는 않았다. 다만 보통의 간찰과 마찬가지로 평궐을 사용하여 존대하는 뜻을 드러내고 있는데, '氣體'·'淸誨' 등의 용어에서 행을 바꾸어 높이 올려 쓰는 대두법을 사용하여 상대를 높이고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