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년 ○월 13일, 金洎가 충주로 가는 일에 대하여 사적인 일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雪月堂 金富倫에게 보내는 편지
1577년 ○월 13일에 金洎가 충주로 가는 일에 대하여 사적인 일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雪月堂 金富倫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처음 상대에 대한 안부를 묻고는 자신이 먼저 안부 편지를 보내지 못했던 점에 대해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또한 권 어르신에 대한 안부 편지도 하지 못했음을 알렸다. 본론으로, 어떤 일로 충주로 가는 것에 대해 사적인 행차가 아님을 밝혔다. 그리고 반대 쪽 사람들이 宣城으로 가서 外論을 가지고 혐의를 삼고자 하기에 충주 행차로 핑계 댄 것이라는 이유를 말하였다. 그래서 이 일과 관련한 해당 문서를 보려 하며 충주 행차에 대한 의심을 가진 상대의 의문을 풀기를 요청하였다. 이 편지를 통해 당시 광산 김씨 문중과 진성 이씨로 추정되는 선성 지역의 세거 성씨 문중 간에 '嫌疑'와 관련한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으나 사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 또는 개요는 알 수 없다.
발급자인 金洎는 본관은 金海이다. 광산김씨예안파보에 의하면, 雲巖 金緣(1487~1544)의 자식으로는 後彫堂 金富弼(1516∼1677), 挹淸亭 金富儀(1525~ 1582)가 있고, 그의 맏사위로 김해 김씨 金蘭宗이 있다. 김계는 바로 김난종의 아들이다. 본문에서 김계는 자신을 스스로 '姪'이라 하였고, 피봉에서 상대에 대해 '叔主'로 표현하였으며 또한 '金參奉 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문건이 '광산김씨 설월당' 문건임을 감안해 보면 '숙'은 바로 '외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발급자의 외숙 항렬에는 김부필과 김부의가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오천 군자리에 거주하며 '烏川七君子'의 일원으로 칭송되었던, 濯淸亭 金綏(1491~1555)의 아들이자 그들의 4촌 형제들인 山南 金富仁(1512∼1584), 養正堂 金富信(1523~1566), 雪月堂 金富倫(1531~1598) 등도 김계에게는 외숙 항렬의 인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참봉 직을 지냈던 것으로 확인 되는 인물은 集慶殿參奉을 지낸 김부륜, '齋郞'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김부필, 집경전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은 김부의가 있다. 하지만 이 편지가 앞서 언급한 대로 '설월당 문중'의 문건임을 감안하고, 또한 실직으로 참봉을 지낸 이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수취인을 설월당 김부륜으로 추측하였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수취인으로 추정되는 김부륜은 자는 惇敍, 호는 雪月堂, 본관은 光山이며, 李滉의 문인이다. 鶴峯 金誠一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1555년 式年試 2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였고, 遺逸로 천거되어 集慶殿參奉, 敦寧府奉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1585년 同福縣監에 부임한 이력이 있다. 저서로는 雪月堂集이 전한다.
이 문서의 발급 연도의 경우는 본문에 '十三'만 기재되어 있어서 알 수 없다. 하지만 피봉에 비교적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기록된 듯한 '丁丑'이라는 간지가 표시되어 있다. 따라서 1577년은 정축년에 해당하는 서력으로 추정하였다. 이 간찰의 피봉은 單封의 형태로 수취인에 관한 정보만 적고 있으며, 좌측 부분에서 우측 부분의 순서로 읽으면 된다. 그리고 봉합처에 착명을 했으나 여타 일반적인 간찰처럼 '謹封'을 기재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외에 몇 가지 글자들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는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편지는 약 5번의 擡頭 또는 極行을 사용하여 상대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光山金氏禮安派譜』,
1차 작성자 :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