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재령이씨 가문의 이수형이 종형제에게 족보간행 사업이 철폐된 근황을 전하는 내용의 편지
4월 25일에 재령이씨 가문의 李壽瀅이 종형제에게 보낸 편지로서, 족보간행 사업이 철폐된 근황을 전하는 내용이다.
이 편지는 영덕의 재령이씨 가문에 전해 오는 것 가운데 하나로서, 피봉이 남아 있지 않다. 발신인은 李壽瀅(1837~1908)이다. 이수형은 경상도 함안에 거주하였으나,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은 '石浦' 즉 현재의 경상도 영양군 석보면이다. 그는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士澄이고 호는 曉山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교수와 순릉참봉을 지냈다. 대원군을 복귀시키자는 상소를 주동한 인연으로 대원군과의 교분이 있었으며, 대원군 및 그의 큰아들 李載冕과 주고받은 편지가 『白雲來鴻帖』으로 남아 있다. 유고로 『曉山文集』이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忠孝堂服執拜狀上' 즉 '충효당의 상복을 입고 있는 분에게 올리는 편지'라고만 되어 있어 재령이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사항을 알 수 없다.
첫머리에 '해를 넘기도록 함께 지냈는데'라는 말과 중간에 '청량하고 그윽한 곳에서 잘 먹고 지내다가'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면, 이수형과 수신자는 지난해와 올해 초에 걸쳐 함께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이수형은 헤어지고 난 이후 술을 보아도 글을 보아도 상대방 생각이 나서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편지를 배내는 시점은 장마철인데, 이때에 상복을 입고 있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최근의 장례 역시 잘 치렀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그리고 이수형 자신은 석포에 도착하였음을 말하고, 이어서 족보간행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는 진행되고 있었던 족보 간행 사업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편지 안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이 다른 가운데, 한 사람의 의견으로 억지로 이루려 하면 일이 성취되지 않을 뿐 아니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동안 간행 사업을 진행하면서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결국 최근에 사업 자체가 중단 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족보간행사업의 근황을 함안에 있는 두 사람에게 잘 알려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 당시 재령이씨 가문의 족보 간행 사업 진행의 구체적인 경위를 파악하려면 별도의 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편지를 보면 의견이 합치되지 않아서 중간에 철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수형은 앞으로 자신은 석포에서 바로 함안의 집으로 돌아갈 것임을 알리면서 편지를 맺고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載寧李氏寧海波譜』,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