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 미상의 4월 13일, 金坪이 金坽에게 안부를 전하고 빨리 수씨를 데리고 여기에 이르러 상경할 것을 상의하라고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연도 미상의 4월 13일, 金坪이 金坽에게 안부를 전하고 빨리 수씨를 데리고 여기에 이르러 상경할 것을 상의하라고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愛尙이 와서 그대의 편지를 받았는데, 안부가 평안함을 알았으니 기쁘고 위로됨이 얕지 않다고 하였다. 자신은 겨우 보존하고 있지만 형 집안에 작은 여종이 수 삼일을 앓아누워있어 점치는 자에게 물어보니 곧 형이 액이 있어 피해 나가야 한다면서 어제 芿叱山 집에 나가 묵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대가 상경하는 것은 늦출 수 없지만 일의 연고가 이와 같으니 아직까지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사체에 대해서는 매우 미안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나의 뜻은 곧 수씨와 그대가 각각 거처한 까닭으로 지금까지 시일을 미루었으니 모름지기 속히 수씨를 데리고 여기에 이르러 상경할 것을 상의하는 것이 곧 상책이라고 하였다. 만약 榮川에 간다면 아마도 일자가 늦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別坐가 모레 출발하여 그대를 미쳐 서로 볼 수 없으니 한스럽고 한스럽다고 하였다. 나머지는 머지않아 만나서 말하겠다고 하였다.
발급인 김평(1563~1617)은 자는 平甫, 호는 克齋, 본관은 光山이다. 아버지는 富信이다. 1591년 식년시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였다. 학행으로 사림의 중망을 받았고, 삼도 사림에서 五賢의 문묘배향을 청하는 상소에 疏首가 되어 활약하였다. 수신인 김령(1577∼1641)은 자는 子峻, 호는 溪巖, 본관은 光山이다. 예안 출신으로 金孝盧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金富倫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했으며, 그 뒤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관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院額이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溪巖集』 6권이 있다. 시호는 文貞이다.
『옛편지 낱말사전』, 하영휘, 돌베개, 2011.12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12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