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12월 28일, 하봉 조호래가 내년 5~6일 사이에 여당에 모여 망우인 현우의 장례식을 논의하자는 제안으로 중계 김수로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902년 12월 28일, 霞峯 趙鎬來가 中溪 金壽老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년 5~6일 사이에 麗堂에 모여 亡友인 弦宇의 장례식을 논의하자는 제안이다. 周一편에 보낸 서찰은 이미 받아보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어느 듯 한해가 저물어 가는데 형제분의 체도는 더욱 왕성하고 溪舍의 등불아래에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를 묻고 令允도 부모님 모시며 공부한 것이 많은 진보가 있어서 꿈속에서도 잊을 수 없음을 전하였다. 지난번에 稷下에서 川后를 만났을 때 상대방의 칭찬이 그치지 않던데 혹시 그때 귀가 가렵지 않았는지 농담도 하였다. 弦宇의 장례는 날짜를 변동할 수가 없는데 멀리서 문상을 와야 할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 혹시 곧 正初이기 때문에 꺼려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고 한번 邪說이 성행한 것이 꺼리고 구애되는 폐단이 지극함을 탄식하였다. 자신은 이달 초순에 자신의 曾王考의 산소 이장을 마치고 16일에 河陽으로 가서 晦夫의 초상을 위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진흙탕을 만난 것은 늙은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 말하고 자질구레한 일로 촉석루에 들어가 며칠을 지냈으나 결국 낭패를 보고 돌아오게 되어 늙어가는 생애가 우습고도 가련함을 전하였다. 川兄은 자신의 이번 행차를 알고 있으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이 이야기를 전해 줄 것을 부탁하고 내년 5~6일 사이에 麗堂에서 한번 모여야 亡友를 地下로 보낼 수 있으므로 이러한 뜻을 여러 동지들에게 널리 전하고 勿川의 여러 사람에게도 전할 것을 당부하였다. 자신과 惠翁 등 몇몇 동지들은 마땅히 기한에 맞추어 달려가겠다고 하고는 만날 날이 10일도 안 남았으나 해가 바뀌니 餞迓增祉하라는 말로 끝맺었다.
자료적 가치
간찰자료는 조선시대의 고문서 가운데 양적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연구가 미진한 상태이다. 간찰 자료는 주로 안부와 건강 등 일상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런 내용들 대부분은 주고받는 사람 상호간에만 이해될 수 있는 내밀한 이야기이거나 이야기 되는 사건의 전말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편지글의 자료적 가치는 바로 이 내밀성과 일상성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간찰자료는 그 자체의 형식과 용어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사회사 혹은 일상생활사, 심성사 등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정사나 일반적인 사료에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개인의 미묘한 생각이나 입장도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간찰은 상호간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주고받거나 학문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학문적인 교류나 토론을 위한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학문적인 토론이나 주장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제3자에게도 전달되며, 후대에 문집에 수록되거나 별도의 서책으로 편집되어 개인의 중요한 저술로 전해지기도 한다.
趙鎬來의 자는 泰兢, 호는 霞峯이며, 丹城의 召南에 거주하였다. 許傳과 朴致馥의 문인으로, 1885년 梧山의 壺谷山房에 이거하여 學令을 만들어 제자를 敎育하고 宗約을 지어 친화에 힘썼으며 李祥奎, 李炳斗, 文正郁, 鄭冕錫등과 교유하였다.
『慶南文化硏究』24집, 이상필, 경남문화연구소 2003
『남명학파의 형성과 전개』, 이상필, 와우[예맥커뮤니케이션] 2005
류지훈,심수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