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에서 1914년에 걸쳐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慶北安東郡豊南面河回洞의 田畓과 垈地, 林野, 墳墓地 등의 소유자로부터 신고서를 제출받아 작성한 토지 장부
安東郡豊南面河回洞土地調査簿
자료의 내용
1913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慶北安東郡豊南面河回洞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3년 2월 10일에서 1914년 5월 10일까지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安東郡豊南面河回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하회동의 토지는 모두 1,146필지 706,231평이다. 이 가운데 전은 640필지 347,511평이고, 답은 307필지 225,578평이고, 대지는 173필지 52,268평, 임야는 18필지 79,399평, 분묘지는 8필지 1,475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전이 답보다 필지수에 있어서는 1.8배, 면적에 있어서는 2.1배나 많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아주 혼란스럽다. 그것은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유자 주소는 대체로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면․동체제에 따라 기재되었다. 즉, 옛 禮安郡이나 안동군의 北先面, 東先面, 臨南面, 西先面 등 통폐합되어 그 명칭이 소멸되어 버린 군․면․동의 이름으로 주소란에 기재되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우에는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다름 아닌 토지 소재지 지역의 주민이기 때문에 기재되지 않았던 것이지만, 자료의 통합을 위해서는 공란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 따라서 주소가 공란으로 처리되어 있는 本洞民들의 주소는 불가피하게 자료상의 토지소재지의 주소 곧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후의 군․면․동체제에 따라 기재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면․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는 각 면별 자료를 통합하여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면 행정구역 개편이전의 주소로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는 國有地가 전 1필지 258평, 답 1필지 834평, 임야 17필지 77,194평이고, 나머지는 모두 民有地이다. 하회동의 민유지 총 소유자는 252명이다. 그리고 이들 252명 가운데, 하회동을 주소로 하는 소유자는 180명이고, 그 밖의 경우가 172명이 된다. 하회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11개 성씨로 金氏 2명, 朴氏 6명, 申氏 2명, 柳氏 153명, 尹氏 2명, 李氏 5명, 鄭氏 3명, 崔氏 2명, 南氏․閔氏 등 각 1명 등이다. 하회동 동민이 소유한 토지는 전 77필지 34,637평, 답 67필지 51,221평, 대지 32필지 8,053평, 분묘지 4필지 576평이다.
기타 및 특이사항
기타사항은 하회동 洞所有로 전 1필지 104평, 답 1필지 364평, 대지 1필지 105평이다. 東洋拓植株式會社 소유로 답이 2필지 2,569평이 있다. 宗中財産으로는 豊南面河回洞柳時萬 명의의 전 1필지 520평이 있다. 그리고 豊南面河回洞柳東垕와 柳河榮 공동소유로 전 2필지 476평, 대지 1필지 135평이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안동군豊南面河回洞의 國有地와 民有地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朝鮮總督府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郡․面․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남기현, 『史林』 32, 수선사학회, 2009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
김순주,류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