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崔孝述이 85세 되던 해에 본인과 처의 사조(부·조·증조·외조), 솔거 자녀, 솔노비 등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문서
내용 및 특징
1870년 崔孝述의 호구단자이다.
대구광역시부解北村中山里 第一統 三戶 通政大夫 前行敦寧府都正崔孝述이 85세 되던 해에 작성한 호구단자로, 이 해 10월(음력)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 주호인 최효술의 본관과 4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통덕랑湜의 아들로, 조부는 통덕랑주진, 증조부는 백불암 최흥원이다. 또 그의 외조는 愚伏 鄭經世의 후손인 立齋 鄭宗魯이고 처는 경주이씨로 이미 죽었다고 표시되어 있다. 처의 四祖가 표시되어 있다.
이어 아들 형제 중 命德은 이미 죽었고, 命愚(43)와 그의 아내 권씨(45), 그리고 손자 3명과 손부 3명이 등록되어 있다.
노비는 모두 7구가 등재되어 있는데, 이 중에 사내종이 3구, 계집종이 3구이나 도망한 노비가 2구이다.
끝에는 전체 인구를 남녀로 구분하여 남7구, 여7구라고 통계를 표시하였다.
자료적 가치
본 문서는 18세기 후반의 대구광역시漆溪 경주최씨 집안의 호적 문서로, 당시 주호였던 최효술의 노비소유현황과 집안의 노비 숫자를 알려 주며, 같은 집안의 다른 자료와 비교하여 볼 수 있는 자료로서 노비 소유의 변천과 호적 등재 상황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가치있는 자료이다.
최효술의 아버지인 최식의 준호구에서의 소유 노비현황은 다음과 같다. 奴가 33口, 婢가 42口 모두 75구이다. 그 중에 仰役奴婢가 13구, 도망노비가 18구, 外居奴婢가 29구, 불명확한 것이 15구로 기재되어 있다. 노비의 연령은 10대에서 90대까지 다양하며, 10~30대까지는 奴의 비율이 높고 40대부터는 婢의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 한 세대사이에 노비가 75구에서 8구로 줄어든 상황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韓國古文書硏究』(增補版),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정진영, 『고문서연구』 25, 2004, 한국고문서학회
『호적 :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 손병규, 휴머니스트, 2007
오덕훈,심수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