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고종18) 4월 그믐날 사촌(沙村)에 살고 있던 김기선(金驥善)·김노선(金魯善)형제가 대포(大浦)에 살던 이원조(李源祚)의 손자인 이관희(李觀熙)에게 보낸 간찰로, 이원조에게 ‘정헌(定憲)’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왔으나 욕의(縟儀)에 참석치 못하는 아쉬움과, 선정계첩(先亭稧帖)에 자신들의 이름을 등재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 답신.
내용 및 특징
1881년(고종18) 4월 그믐날 의성사촌(沙村)에 살고 있던 김기선(金驥善)·김노선(金魯善)형제가 대포(大浦)에 살던 이원조(李源祚)의 손자인 이관희(李觀熙)에게 보낸 간찰이다.
이원조(李源祚)가 사망한지 10년 뒤인 1881년에 고종(高宗)은 대제학(大提學)조성교(趙性敎)에게 시장(諡狀)을 짓게 하고, ‘정헌(定憲)’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가묘(家廟)에 제사하게 하였는데, 이관희(李觀熙)에게 욕의(縟儀)에 참석치 못한다는 내용이다.
먼저 오랫동안 소식이 막혀 항상 그리워하였던 심정을 밝히고 상대방의 근황이 어떠한지 물었다. 왕존장대감(王尊丈大監)에게 은전이 내려와 지금 성대한 욕의를 거행하려하는 이때에 마땅히 달려가 축하를 드려야하나 노쇠하여 성의를 표시할 방법이 없어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선정계첩(先亭稧帖)에 자신들의 이름이 등재된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 후의에 보답하는 뜻으로 2민(二緡)의 사례금을 보내면서 두 집안간의 우의를 영원토록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하자고 하였다.
추신으로 숙부와 당숙에게도 자신들의 뜻을 전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정에서 이원조(李源祚)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가묘에 치제(致祭)하는 영광된 자리를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과, 문회계(文會契)나 강회(講會) 등을 통하여 학문을 토론하고 우의를 다지며 후세에까지 자손들에게 학문이 이어지기를 희망하였음 볼 수 있다.
『응와 이원조의 삶과 학문』, 경상북도대학교 퇴계연구소, 역락, 2006.
「凝窩先生年譜」, 『凝窩全集』, 이원조, 여강출판사, 1986
1차 집필자: 심수철 , 2차 집필자 : 김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