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장석유(張錫裕)가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답신에 첨부된 별지로, 선영(先塋)과 가까운 다포(多浦)에 묘지를 쓰려다가 현지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상대방에게 100민(緡)의 돈을 지불하고 한양과 도내의 여러 장로(長老)들을 잘 설득하여 묘지를 쓸 수 있게 해달라는 사연을 담은 내용.
내용 및 특징
1879년장석유(張錫裕)가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답신에 첨부된 별지이다.
선영(先塋)과 가까운 다포(多浦)에 묘지를 쓰려다가 현지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상대방에게 100민(緡)의 돈을 지불하고 한양과 도내의 여러 장로(長老)들을 잘 설득하여 묘지를 쓸 수 있게 해달라는 사연을 담은 별지(別紙).
묘지를 쓸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다가 선영과 가까운 다포(多浦)에 묘지를 쓰려고 했지만, 현지 주민들이 완강하게 거부하여 묘지를 쓰지 못했는데, 상대방의 허락으로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이 생겨 매우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주선하여 한양의 여러 장로(長老)들과 도내의 여러 아는 사람들과 잘 상의하여 다포에 묘를 쓸 수 있게 해 주신다면 그 댓가로 100민(緡)을 드릴 것을 약속하였다.
피봉에는 ‘태고(胎告)’라 했는데, 이는 태지(胎紙)로 알린다는 뜻이다. 태지는 별지(別紙)의 다른 말이다.
자료적 가치
간찰(簡札)은 예로부터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하였으며 인간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특히 관아(官衙) 의 송사(訟事)에도 산송과 관련한 사건이 가장 많으며, 선조의 무덤과 관련하여서는 자손들이 가장 정성을 기울인다. 이 간찰도 돈을 지불하고 지인을 통하여 한양의 여러 장로(長老)들과 도내의 여러 지인들을 설득하여 선산이 가까운 곳에 선조의 무덤을 쓰려는 후손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응와 이원조의 삶과 학문』, 경상북도대학교 퇴계연구소, 역락, 2006.
「凝窩先生年譜」, 『凝窩全集』, 이원조, 여강출판사, 1986
1차 집필자: 심수철 , 2차 집필자 : 김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