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철종 8) 7월 23일, 기하(記下) 장석우(張錫愚, 1787-?)가 대포(大浦)에 사는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정자(亭子)의 기문(記文)을 지어 보내니 이 본 그대로 각수(刻手)에게 부쳐서 새겨 걸어 놓으라는 내용의 간찰
내용 및 특징
1857년(철종 8) 7월 23일, 기하(記下) 장석우(張錫愚, 1787-?)가 대포(大浦:한개 마을)에 사는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에게 보낸 간찰이다.
정자(亭子)의 기문(記文)을 짓는 일은 묵은 빚이니, 비록 혼란스럽지만,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기문 짓는 빚을 꼭 갚겠다고 하였다. 인리(人吏) 중에 글씨 잘 쓰는 자에게 부탁하여 써서 올리니, 비록 아름다운 기운은 없으나 정밀한 기교를 볼만하다고 전한다. 이본으로 각수(刻手)에게 부쳐서 새겨 걸어 놓으면 또한 힘을 덜 수 있을 거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정자는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만년의 은신처로 삼은 곳으로 추정된다. 그는 60세에 이곳에 들어와 정자를 짓고 자연과 더불어 지내면서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만귀정(晩歸亭)”이란 그의 시가 『응와전집(凝窩全集)』2권에 남아 있다.
「만귀정기(晩歸亭記)」을 보면, 응와는 50년 동안의 관직 생활을 하면서 하루도 돌아가기를 잊은 적이 없었고 본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목민관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수레를 멈추고 방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언젠가 은둔처를 구하면 작은 초당(草堂)을 지어 노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52세에 목재와 기와를 매입해 놓고 3년 뒤에는 예서(隸書)를 잘 쓰는 조소눌(曺小訥)에게 정자의 현판을 새기게 하였다. 그리고 59세에 경주부윤을 그만두고 돌아와 청천(淸川) 수렴동(水簾洞)에 터를 잡았다가 다시 조암(祖巖)의 강 언덕으로, 또다시 홍개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모두 세 번이나 터를 옮기고 난 뒤에 비로소 이 옥계의 골짜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만귀정(晩歸亭)’라 이름한 것은 늦게 돌아온 것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도 있고, 10년에 걸쳐 터를 잡고 3년에 걸쳐 집을 지은 것이 늦었다는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간찰(簡札)은 서찰(書札)·편지(便紙)·간독(簡牘)·서간(書簡)·척독(尺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고대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 내용은 자신의 감정이나 사고 등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어서 인간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凝窩先生年譜」, 이원조, 『凝窩全集』, 여강출판사, 1986
「凝窩 李源祚 先生 生平事蹟考」, 이세동, 『동방한문학12집』, 동방한문학회, 1996
1차 집필자: 황동권 , 2차 집필자 : 김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