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철종 8)이해상(李海祥)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오른 것을 축하하며 보낸 서찰.
내용 및 특징
1857년(철종 8)이해상(李海祥)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오른 것을 축하하며 보낸 서찰이다. 전후 두 번이나 안부를 서찰을 기조(騎曹 : 兵曹)의 아좌(衙座)에게 곧바로 전달하지 못하다가 호우(毫宇 : 이원조의 또 다른 호(號))의 사가에 미루어 펼치고는 비로소 늙은 선비가 무료함을 깨닫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을 끝내 경재(卿宰 : 宰相)의 문하에서 머뭇거려 지난번 직소(直所)에서 곧바로 말을 하지 못하여 지금껏 서운하다고 하였다. 상대의 행차가 돌아와 향을 사르며 고하는 경사스러운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니 남의 신하가 되고 남의 자식이 되어 영광스럽고 효성스러움이 지극한 것이라고 하였다. 더군다나 형제가 무고한 상황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며 부럽고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어 스스로 슬픈 것은 자신의 병은 아침저녁으로 죽을 듯 하다가도 오히려 이렇게 더딘 것은 마치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하니 걱정스럽고 고생스럽다고 하였다. 목전에 또 각 집에 두증(痘症)의 근심이 있어 마음 졸이며 날을 보내는 마음 배나 걱정이 되었는데 노호(蘆湖 : 지금의 노량진 부근)의 종손(從孫) 아종(兒鐘)이 좋은 상황이라 먹고 살도 올라 조금도 큰 병의 피로함은 없다고 하였다. 또 그의 어미 역시 손상됨이 없으며 일상생활에서 남을 대하는 태도가 웃으면서 보내고 있으니 자신 집의 경사라고 하였다. 경사가 있으면 인척(姻戚)들 끼리 서로 문안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로 흠이 없는 물건에 관하여서는 애초 서로 논의하지 않을 것이니 때 맞게 축하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딸아이가 두증(痘症)을 앓고 있어 마음을 졸이는데 이러한 근심으로 분주하여 정성을 드릴 계획을 세울 수 없다며 부끄러워하였다. 감히 용서해 달라며 끝을 맺고 있다.
「응와연보(凝窩年譜)」에 의하면, 1856년(철종 7)에 병조참판에 배명된 사실로 보아 여기서 축하의 사연을 보낸 것은
자료적 가치
이 간찰을 통하여 당시 이원조가 병조참판에 오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원조, 『凝窩全集』, 여강출판사, 1986
「凝窩 李源祚 先生 生平事蹟考」, 이세동, 『동방한문학12집』, 동방한문학회, 1996
「凝窩 李源祚 先生 生平事蹟考」, 전용신, 『韓國古地名辭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3
1차 집필자 : 박상수, 2차 집필자 : 김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