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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이해상(李海祥)가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위문 간찰.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A01+KSM-XF.1848.0000-20090831.E47840110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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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해상, 이원조
작성시기 1848
형태사항 크기: 23 X 42.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안동대학교 박물관 /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안내정보

1848년 이해상(李海祥)가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위문 간찰.
1848년(헌종 14) 이해상(李海祥)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보낸 위문 서찰로, 아이들은 점점 자라는데 먹을 것이 없어 매우 걱정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凝窩 李源祚 先生 生平事蹟考」, 이세동, 『동방한문학12집』,동방한문학회, 1996
1차 집필자 : 박상수, 2차 집필자 : 김상환

상세정보

1848년(헌종 14) 이해상(李海祥)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보낸 위문 서찰이다.
대상마을개관
죽전동(竹田洞)조선후기(1789년) 이래 안동부(安東府) 풍북면(豊北面)에 속하였다. 1895년 지방관제 개혁으로 안동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원래의 죽전동과 답곡리(踏谷里)를 병합하여 풍북면에 소속되었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풍산면(豊山面)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악심(岳心, 화심이, 악심이), 학대(鶴臺, 악대), 관음사(觀音寺, 관음절, 가늠절), 죽전(竹田, 대밭골, 대밭) 등이 있다. 1913년 현재 죽전동에는 권씨, 박씨, 김씨, 손씨, 남씨, 나씨, 엄씨, 안씨, 이씨, 정씨(鄭), 원씨, 최씨, 황씨, 석씨, 임씨(林), 장씨(張), 장씨(蔣) 등 적어도 17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다. 이 가운데 권씨, 박씨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자료의 내용
1913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照査局)에서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죽전동(竹田洞)의 전답(田畓)과 대지(垈地), 지소(池沼), 임야(林野), 분묘지(墳墓地) 등을 조사하여 기록한 대장이다. 죽전동의 토지조사를 위한 신고 또는 통지는 1913년 3월 26일부터 1914년 5월 5일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죽전동의 토지는 모두 1304필지 513,985평이다. 이 가운데 전은 640필지 254,696평이고, 답은 571필지 235,252평이고, 대지는 62필지 9,998평, 임야는 1필지 5,998평, 분묘지는 28필지 7,922평, 잡종지(雜種地)는 1필지 10평, 사사지(社寺地)는 1필지 109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전이 답보다 필지수에 있어서는 1.1배, 면적에 있어서도 1.1배 정도 많다.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의 소유자(所有者) 주소란(住所欄)은 아주 혼란스럽다. 그것은 토지 신고(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면·동체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옛 예안군(禮安郡)이나 안동군북선면(北先面), 동선면(東先面), 임남면(臨南面), 서선면(西先面)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지 않은 본동민들의 주소는 불가피하게 자료상의 토지소재지의 주소 곧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후의 군·면·동체제에 따라 기재하였다. 신설동이나 두세 동이 통폐합된 경우에는 개편이전의 거주지 동명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면·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는 국유지(國有地)가 임야 1필지 5,998평이고, 나머지는 모두 민유지(民有地)이다. 죽전동(竹田洞)의 민유지 총 소유자는 289명이다. 그리고 이들 289명 가운데, 죽전동을 주소로 하는 소유자는 80명, 그 밖의 경우가 209명이다. 죽전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17개 성씨로 권씨, 박씨가 각 15명, 김씨 9명, 손씨 7명, 남씨, 나씨가 각 5명, 엄씨 4명, 안씨, 이씨, 정씨(鄭)가 각 3명, 원씨, 최씨, 황씨가 각 2명, 석씨, 임씨(林), 장씨(張), 장씨(蔣)가 각 1명) 등이다. 죽전동 동민이 소유한 토지는 전 325필지 113,720평, 답 207필지 66,446평, 대지 27필지 3,823평, 분묘지 9필지 1,998평, 잡종지 1필지 10평, 사사지 1필지 109평이다. 타동민 소유자 가운데 동면(同面) 거주자는 48명, 동군(同郡) 거주자는 150명, 타군민 49명(예천40, 봉화3, 영천3, 금산1, 문경1, 풍기1), 타도민 3명(충북2, 경상남도1) 등으로 나타난다.
기타 및 특이사항
기타사항은 죽전동(竹田洞) 동소유로 잡종지(雜種地) 1필지 10평, 사사지(社寺地) 1필지 109평,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창풍동(昌豊洞)광흥사(廣興寺) 소유로 전 7필지 2,771평, 답 34필지 22,348평이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죽전동(竹田洞)의 국유지(國有地)와 민유지(民有地)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문중(門中), 서원(書院), 향교(鄕校), 사립학교(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토지(土地)·임야(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부(府)·군(郡)·면(面)·동리(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凝窩年譜」, 이원조, 『凝窩全集』,여강출판사, 1986
「凝窩 李源祚 先生 生平事蹟考」, 이세동, 『동방한문학12집』,동방한문학회, 1996
1차 집필자 : 박상수, 2차 집필자 : 김상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8년 이해상(李海祥)가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위문 간찰.

[피봉]
答狀上 省式謹封

[본문]
卽蒙委便
惠問披感 揮涕之餘 謹審
令體履 有欠損節 意是霄鶻縶
則病耳 公道尙遠 今何猝憊也 計
將攝多方 已復常道 區區 旣咷且祝
伯府近候 一直健旺 餘節依舊愆際 又
禫祭已過 悲苦之私 頓無時日 苟寄
之念 且外處至情 皆未歸土 拊時銷
骨之懷 如何盡喩 野村姪家 幸皆
安遣 新孩 漸向充茁 而但其穀難
以充腹 是可憐憫 世間合散悲懽 不
可以幸時契分 到頭質言 侑亡悼存

之辭 俱極瀉盡裏素 幽明感泣 寧
有不原於說未到處耶 餘萬收淚
略呼不宣 謹拜謝狀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