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43년 조술립(趙述立)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A01+KSM-XF.1843.0000-20090831.E47840561_0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조술립, 이원조
작성시기 1843
형태사항 크기: 32 X 42.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안동대학교 박물관 /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안내정보

1843년 조술립(趙述立) 서간(書簡)
1843년(헌종9) 9월 21일 인제(婚弟) 조술립(趙述立)이 대포(大浦)의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한양으로 가려고 하느냐고 질책하고, 수다사(水多寺)에서 만나 자신의 선조 문집을 교정하자고 제의하는 내용.
「凝窩先生年譜」, 『凝窩全集』, 이원조, 여강출판사, 1986
KSAC+A01+KSM-XF.1843.0000-20090831.E47840561_1-DES.INF
1차 집필자: 심수철 , 2차 집필자 : 김상환

상세정보

1843년(헌종9) 9월 21일 인제(婚弟) 조술립(趙述立)이 대포(大浦)의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한양으로 가려고 하느냐고 질책하고, 수다사(水多寺)에사 만나 자신의 선조 문집을 교정하자고 제의하는 내용.
내용 및 특징
1843년(헌종9) 9월 21일 인제(婚弟) 조술립(趙述立)이 대포(大浦)의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이다. 3년에 한번 만난 것도 관아에서 잠시 만났을 뿐이니, 연분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아서 스스로 홀로 서글프게 돌아오니, 오히려 몸에 병이 낫지 않은 것 같은 심정임을 밝히고, 공사(公私)로 응대하는 것이 언제 진정되어 거문고와 서책의 옛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였다. 아직도 직무를 벋어나지 못하여 한양으로 가려고 하느냐고 되묻고 가내의 가족들은 모두 예전같이 편안한지 안부를 다시 들려달라고 하였다. 인제(姻弟)는 한번 밖에 나간 것이 문득 여러 병을 얻어 폐물이 되었으나 영원히 폐물이 되기는 싫으며, 또 이러한 대살시(大煞時)에 몸을 어루만지며 홀로 슬퍼하고 탄식할 뿐임을 토로하고, 집안 가득히 신음하고 있는 것이 흡사 병화(兵火)의 남은 열기와 같아 안주(安住)하지 못하게 하니, 마침내 고인(古人)이 옥성(玉成)에 비유한 것이 속유(俗儒:자신의 비유)같은 노둔한자를 위하여 가설한 것이 아님을 언급하였다. 선고(先稿)는 원집(原集)과 속집(續集)을 막론하고 모두 연좌되어 두서없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운수가 사나운 것 같으나, 이 또한 핑계로 하는 말이니 마땅히 슬퍼할 뿐임을 실토하고, 언제 상대방과 안온한 자리를 마련하여 마주대하고 선고(先稿)도 읽으며 산처럼 쌓인 회포를 풀 수 있을지 붓으로는 다하기 어려움을 전하면서, 조만간에 한양의 행차는 반드시 좋은 약속이 있을 것이니 다시 한온하게 하룻밤의 대화를 나눌 것을 제의하였다. 간(榦)아이는 한번 나아가 뵙는 정의(情義)를 그만둘 수 없으나 억지로 발섭(跋涉)하는 것이 염려되니 덮어서 비호해주기를 기대하고, 말(馬)은 이미 반쯤 허락을 받았으니 그 아이가 돌아올 때에 조랑말 한 마리를 보내주어 병든 자신이 점지(占地)할 풍수사를 맞이하여 부득이한 인사(人事)를 닦고 이어서 큰일을 경영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와룡(臥龍)의 유생가(柳生家)를 운운하던 일은 사람들 속에 바쁜 나머지 과연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묻고, 다시 시응(時應)천칙(天則)등 여러 친구들을 독촉하라고 권하고 남은 사연은 붓으로는 다할 수 없음을 밝혔다. 추신으로 조만간에 선산(善山)수다사(水多寺)에서 묵으려고 하며 수다사와 안곡역(安谷驛)과의 거리는 5리에 불과하니, 수레가 만약 안곡역에 이르면 역지기인 이초득(李草得)을 시켜 자신에게 연락할 것을 당부하고, 집 아이가 매원(梅院)으로 간 것은 인사를 위한 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니 그로 하여금 이룰 수 있게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시기는 이원조(李源祚)가 7월에 제주목사를 사직하는 글을 올리고, 윤7월에 한양에 들어가 부절을 되돌려 드리고, 8월에 성묘할 일로 휴가를 얻어 잠시 고향에 돌아와 있던 기간인데, 친인척들이 이원조제주에서 돌아올 날을 기다렸음을 알 수 있으며, 돌아오자마자 여러 일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 집안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만한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응와집』에 실려 있는 조술립과 관련된 시는 다음과 같다. 神光寺 與趙弘濟[述立]校梅隱集[二首] 當日蒙衝艤水涯 法門衰敗奈今何 餘生浪走紅塵路 古道猶傳墨帳家 發篋怳如供灑掃 聯床未暇和詩歌 初心道德思塡補 更向源頭着眼過 今行非是學禪虛 靜坐要看未發初 省事支林猶愛駿 放言蒙叟亦忘魚 經旨更尋梳洗後 人情多見別離餘 坡翁高處君知否 碁酒尋常讓不如 輓趙弘濟 記昔拜梅師 金聲動墨帷 持躬合榘矱 講理析毫絲 函筵詩禮問 甥館起居隨 憐我嬰紳笏 欽君拈拂鎚 才豐命獨嗇 心困迹逾畸 言議窮冞確 文章老益奇 閒雲雖未出 朗月輒相思 屬我懸車晩 怪君命駕遲 秋風撼老木 落日翳疏籬 一哭不成聲 餘生寧久歧 無由白馬赴 抆涕寄哀辭
「凝窩先生年譜」, 『凝窩全集』, 이원조, 여강출판사, 1986
1차 집필자: 심수철 , 2차 집필자 : 김상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3년 조술립(趙述立) 서간(書簡)

[피봉]
수신, 大浦 令座 執事
발신, 玄川 候書

[본문]
三載一面 無異廨宇 坌刺損冷者之無
分 有如是矣 渠獨悵悵而歸 猶未瘳也 未
知公私酬接 幾日乃鎭 而琴書舊樂
次第整頓否 由職尙未解 而又將料理
西行耶 閤中長少節 俱依前樣否 玆
區區願更聞者也 姻弟 一出門 便添幾病
固知爲廢物 而不欲永作廢物 又是
大煞病時 一拊躬悼歎而已 滿室嘔
吟 恰同兵燹餘熱 極令按捺不得 終知
古人玉成之喩 非爲俗儒鈆鈍者設 奈何
先稿 毋論原續 有所坐而俱沒頭端 誠若
摯矣 此亦諉辭 惟不當是哀也已 何時穩得
意中人 盡意磨硏 如向對酬酌 有懷山積 非
筆可旣 早暮西旆 必踐芳約 復穩做一
宵話 如何如何 榦兒 一晉 情義之所不可已 强
跋涉 須可念也 想必思所以庇覆之矣
鬣者 旣得半諾 渠歸也 許送一款段 使此
病軀 邀師占地 因修萬不獲已底人事 繼
營大事也 且不妨 而向覸此求恳已慣 苦酬禦
而渠適爲紛聒人 故未敢强耳 臥龍柳
生家云說 果不忘於怱撓人海中耶 幸望復
爲加鞭於時應天則 僉友如何 餘憂愁燥懣
執筆多忘 萬不宣式
癸卯 九月 卄一日 姻損弟 述立

早晩還欲捿身於善山>水多寺之去安谷驛 不過
五里地 華旆 若抵右驛 招問右驛漢李草
問弟行止 而彼此間通奇如何 漢拿杖二箇 此
便必付如何 迷兒 梅院行 不獨修人事地 俾使遂之 此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