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술효(述孝)가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서찰로, 과거시험장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1824년술효(述孝)가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서찰로, 과거시험장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인편이 다녀간 뒤 달이 바꾸니 다시 그리웠는데 인편을 통해 은혜로운 서찰을 받고 서늘해지는 날씨에 빙모(聘母)의 체력에 매번 편치않다는 것을 알고는 비록 노인의 예사로운 병이라고는 여기지만 걱정이 많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당(生堂 : 生母)의 기력이 건강하고 부모모시는 나머지 안부는 그런대로 지탱하고 있으며 아들도 편안하니 위안이 되지만 미칠 수 없는 아픔에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느냐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인제(姻弟)는 예부터 신명(身命)은 장차 늙고 근심 속에서 늙어가는 것인지, 지난번 산양(山陽)의 채실(蔡室)의 병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가보니 조금 나아가는 지경이라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병과 아이들의 조그마한 병들을 호소하니 이 사이 근심을 말로 할 수 없는데 과일(科日)이 점점 다가오니 다만 더운 가운데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범절이 두서가 없는 것은 말로 할 수 없고 도리어 상대의 아이들이 모두 분주하니 진실로 슬픈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타까워하였다. 먼저 선접(先接 : 과거를 볼 때에, 남보다 먼저 시험장에 들어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던 일)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늦어 한쪽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좋은 주인은 이미 남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으니 장차 어찌할지 걱정하였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집에 서찰을 부쳐 멀리서 보존하여 두었다고 하였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또 주장하여 지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끝내 득실이 탄식스럽다고 하였다. 성내(城內)의 갑작스런 어려움이 다시 안정이 되었고 자신은 이윽고 산양(山陽)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아직은 읍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일이나 들어갈 것이니 다시 찾아 볼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기필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백미형(伯眉兄) 어느 사이에 출발해 올 것인지, 보름 전에 어쩔 수 없이 담제(禫祭 : 대상(大祥)을 치른 둘째 달 하순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제사)를 과연 처음 정일(丁日)에 지내는지 물었다. 참여하고 싶지만 기필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아이의 사직은 거의 다행한 일인데 자신의 과시(科時)를 준행할 바가 없으니 어찌 할지 걱정하였다. 인편이 바빠 빙모(聘母)에게는 서찰을 올릴 수 없어 죄스러운 뜻을 전해 달라고 하였다.
당시 과거시험장에서 벌어지는 자리다툼이 대단하여 『왕조실록(王朝實錄)』 1864년(고종 1) 7월 28일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었다.
“이번에도 만약 과장(科場) 안이 좁다는 핑계로 길거리에 앉겠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일체 시권(試券)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선접(先接)할 때에 만약 혹 다투고 싸우며 심지어 때리고 치는 경우까지 있으면 해당 접주(接主)와 그 가장(家長)을 논죄하겠다는 뜻으로 일일이 효유(曉諭)하고 시관(試官)들도 각각 이런 뜻을 확실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료적 가치
이 간찰을 통해 술효(述孝)가 양자를 갔음을 알 수 있고 과거시험장의 풍광을 엿볼 있다.
이원조, 『凝窩全集』,여강출판사, 1986
「凝窩 李源祚 先生 生平事蹟考」, 이세동, 『동방한문학12집』,동방한문학회, 1996
1차 집필자 : 박상수, 2차 집필자 : 김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