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순조 21) 9월 17일 척기(戚記) 강세륜(姜世綸)이 보낸 간찰.
내용 및 특징
1821년(순조 21) 9월 17일 척기(戚記) 강세륜(姜世綸)이 보낸 간찰이다. 서명(署名)에서 성(姓)은 적지 않고 이름만 적었지만 시대나 교류한 사람들을 조사해본 결과 발신자는 강세륜으로, 수신자는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부친인 이규진(李奎鎭, 1763∼1822)으로 추정된다. 이규진은 1814년(순조14)에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가, 1815년(순조15)에 병 때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있었다. 피봉의 ‘농호(農戶)’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서두의 사휘(姒徽)는 정조(正祖)로 비(妃)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金氏, 1753~1821)를 가리킨다. 슬하(膝下)에 소생(所生)이 없이 안타까운 생을 보내지만 기꺼이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소생을 원자(元子:순조)로 삼았다. 여기서 면부(緬祔)는 묘를 이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효의 왕후의 건릉(健陵: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은 본래 정조(正祖) 승하 후 친부(親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릉원(顯陵園:후에 장조(莊祖) 융릉(隆陵)으로 개칭) 동쪽에 안장(安葬)되고자 했던 유언에 따랐으나 풍수학(風水學)으로 나쁘다고 해서 천장(遷葬)의 논의가 있던 차에 효의 왕후가 이 해에 승하(昇遐)하자 현재의 위치인 융릉(隆陵) 서쪽으로 이장(移葬)한 것을 말한다. 이런 정황은 『순조실록』 21년 8, 9월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규진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성주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은택을 입은 선왕(先王:정조)의 면부(緬祔)에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였다. 참고로 당시 응와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성주로 내려가 있어서 은택을 입은 선왕의 면부(緬祔)에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였다. 『응와연보(凝窩年譜)』를 보면 1820년(순조20), 그의 나이 29세 되던 4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배명하고 부름을 받아 서울에 들어가 세마(洗馬)이휘녕(李彙寧)과 함께 『퇴계집(退溪集)』을 읽었고, 7월에 지평(持平)을 배명하였다가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에 정침(正寢:몸채)을 새로 이루고, 차녀를 낳았다.
또 당일에 상대의 아들이 전해준 간찰을 받고 객지에서 매우 위로가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들이 왕래할 정도의 친분을 가진 사이였음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은 묵은 병으로 몸이 좋지 않고 운수도 사나와 8, 9삭(朔)을 소모하면서 매우 고생을 하였다는 근황을 전하고, 화갑(花甲:還甲)의 늙은 나이에 멀리 변방의 수령으로 와 있는 상황을 말하였다. 또 한해만 있으면 임기가 만료가 되는데 그 사이에 소식을 듣지 못해 매우 서운하여 편지를 대하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암연한 감정이 든다고 하였다. 상대의 아들 영군(令君)과 밤낮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가 되었는데 오늘 떠난다고 하니, 더욱 마음잡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상대가 식사를 잘하면서 몸을 보중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간찰을 통해 발신자 강세륜(姜世綸)이 도성(都城)에서 일어나는 왕가(王家)의 소식을 전하고, 자신은 화갑(花甲)의 늙은 나이에 변방의 수령으로 나 간 사실을 말했다. 또한 수신자의 아들과도 깊은 교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凝窩年譜」, 이원조, 『凝窩全集』, 여강출판사, 1986
『동방한문학12집』, 「凝窩 李源祚 先生 生平事蹟考」, 이세동, 동방한문학회, 1996
1차 집필자 : 박상수, 2차 집필자 : 김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