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순조 11)에 아우 요산수령(遼山守令)강준흠(姜俊欽)이 기성낭관(騎省郎官)으로 재직하던 이규진(李奎鎭, 1763∼1822)에게 그간의 안부를 묻는 간찰이다.
내용 및 특징
1811년(순조 11년)에 아우 요산수령(遼山守令)강준흠(姜俊欽)이 기성낭관(騎省郎官)으로 재직하던 이규진(李奎鎭, 1763∼1822)에게 그간의 안부를 묻는 간찰이다. 발신자의 서명에서는 성(姓)은 적지 않고, 이름 준흠(俊欽)만 기록이 되었으나 시대와 당시 교류했던 인물을 토대로 조사하여 강준흠으로 추정하였다.
또 서울에 있을 때 제서(除書:임명장)를 받아 보았지만 서로 만나지를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름만으로는 어느 곳인지 정확한 지역을 알지 못하겠지만 화령(華嶺)을 넘어 서울로 갔다[西笑]는 상대의 소식을 들었다고 전하면서 자신은 웅새(熊塞)에서 오랫동안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또 상대의 아들도 당후(堂后)를 출입하면서 연이어 벼슬에 올라 자신도 덩달아 기쁘다고 하여 당시 수신자의 아들 이원조(李源祚)도 관직에 올라 아버지와 함께 벼슬살이를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응와연보(凝窩年譜)』를 보면 1811년(순조11), 그의 나이 20세 되던 5월에 기주관(記注官)의 일을 섭행(攝行)하여 당후(堂后)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후는 조선조에 승정원(承政院)의 정7품 벼슬아치인 주서(注書)가 거처하는 곳이다. 당시에 이규진이 병조 정랑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원조가 부친의 환후(患候) 소식을 듣고 가서 서울에 머물렀다. 얼마 있지 않아 기주관의 일을 섭행(攝行)하여 당후에 들어가 순조(純祖)의 은총을 받았다.
강준흠은 뜻밖에 전성(專城:지방 고을의 수령)이 내려져 매우 기쁘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기근이 심하여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있어 고민이라고 하였다. 상대가 요사이 수문(脩門:대궐문)을 출입하고 있을 것이니 어찌 생각이 깊은 산골에 사는 저에게 까지 미치겠느냐며 농 섞인 말로 끝을 맺었다. 아울러 담배[南草] 두 근과 포(脯) 한 첩, 해묵(海墨) 두 정(丁)을 보냈다.
자료적 가치
이 간찰을 통해 수신자인 이규진가 기성낭관(騎省郎官)으로 있을 때 아들 이원조도 나란히 벼슬에 올라 관직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원조, 『凝窩全集』, 여강출판사, 1986
「凝窩 李源祚 先生 生平事蹟考」, 이세동, 『동방한문학12집』, 동방한문학회, 1996
1차 집필자 : 박상수, 2차 집필자 : 김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