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년 7월 3일에 아버지가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무진년 7월 3일에 아버지가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우선 아들이 침을 맞고 조섭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지 수십일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면서, 천리 먼 길을 가서 병을 고치는 것도 크게 옳지 않은데다 아직 어버이에게 서신을 보내어 허락도 받지 않은 처지로 얼굴에 침을 맞는다는 것은 더욱 좋지 않은 생각임을 타이르고 있다. 또 자신은 침을 두려워하여 남이 침을 맞는 것도 눈 뜨고 못보는데 어떻게 이런 경솔한 행동을 했느냐고 나무라고 다시 이런 행동을 하지 말고 즉시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 또 그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는데, 차비와 숙식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를 묻고, 일체를 다 거절하되 객지에서 조리하겠다고 호언 하던 것이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하면서 겸손한 말로 사양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 몸소 제질(弟姪)과 아손(兒孫)들을 거느리고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는데, 수신인인 아들에게는 곁에 없어도 별 불편이 없노라고 위로하였고, 정유보(丁酉譜)와 관련해서는 중요한 사안이니만큼 상세히 설명하고 치밀하게 접근할 것을 명하는 내용도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유보는 선군(先君)으로부터 나왔는데, 이때에 팔을 끌어당기면서 말리던 사람들이 곁에서 백방으로 억제하였으므로 또한 독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만족스럽지 못한 곳이 없지 않다면서, 접때 성흠(性欽)의 말이 큰 파 작은 파 어른들이라고 호를 허다하게 사용하였기 때문에 또한 그에 따른다고 한다는데, 천리 멀리서 삼가 타투지 말기를 명하였다. 그리고 보청의 여러 족씨들께서 오르기를 허락하면 조용히 여러 번 말씀드리는 것이 좋은데, 폐일언하면, 번잡함이 심하면 오래 멀리 전할 수 없으니 간략함을 쫓아서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있는 곳은 6월 11일 비온 뒤로 계속 가물어 밭 두둑이 허옇게 갈라지고 있어서 머슴들이 밤마다 들잠을 잔다는 힘든 상황과, 인심은 사나워지고 곡가(穀價)는 정조(正租)는 칠전(七錢)이고 섞인 것은 육전(六錢) 팔리(八里)인데 권안(權安) 아재가 와서 약속하기를 일간 시세를 봐서 모두 내어 줄 계획이라는 말, 앞뒤 편지에 추수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으니 경기 지방에는 비가 자주자주 오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다는 말 등을 썼다. 또 평지(坪地) 족숙과 족형들이 모두 편지를 보내지 않으니 이렇게 말하고 내 편지를 삼가 내보이지 말 것을 시키고, 삼가고 주밀한 것이 고금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묘법이라는 점을 환기했다.
오리(梧里)의 이자응(李子應)이 요절하여 사람이 왔는데, 장삿날이 금월 초 엿새라 한다. 조손(祖孫)의 편지를 동봉하여 체신에 부쳤고 일간에 부칠 돈의 금액을 토론할 계획이니, 기다렸다는 듯하지 말고 삼가 물건을 바꾸거나 섞어서 남용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자료적 가치
『慶南文化硏究』24집,「진주 지역 문집의 현황과 그 의미」, 이상필, 경상남도문화연구소 2003
『남명학파의 형성과 전개』, 이상필, 와우[예맥커뮤니케이션] 2005.
『晋陽續誌』, 성여신, 남명학고문헌시스템
『端磎集』, 김인섭, 남명학고문헌시스템
『琴臯集』, 성석근, 남명학고문헌시스템
1차 집필자: 김남규, 2차 집필자: 오덕훈